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9)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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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9)

그는 평소 자신은 지방에서 썩기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다.
권력의 핵심으로 치고 나가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던 그는 기황후의 측근 중 한 명인 티무르부카가 낙양성에 머무르는 것을 알고는 병사 몇몇을 시켜 이십사 시간 감시하도록 했다.
멸절사태와 일단의 무리가 대문을 부수고 쳐들어가는 것을 보곤 감시하던 병사는 즉시 부천호 조정에게 알렸다.
그러나 조정은 위급할 때, 나서야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느긋하게 오는 바람에 한발 늦어버린 것이다.
"공자님, 죄인들을 내어주시면 당장 추국하여 배후를 밝혀내겠습니다. 감히 태감께서 머무르시는 장원에 쳐들어오다니, 이것은 필시 자정원당의 반대파들이 획책한 일이 분명합니다."
"아니, 됐소. 그리고 반대파가 아니라 사소한 의견충돌로 벌어진 일이고 다친 사람도 없으니 이만 물러나시오!"
기어코 몇 마디 덧붙이려는 그에게 칼 같이 잘라 말하고 내보냈다.
비록 아홉 명 뿐이지만, 사람을 부리다보니 아랫사람을 호령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다행히 내 호령에 위엄이 서렸는지, 부천호 조정이라는 자는 말도 못 붙여보고 이백에 달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새삼 자정원당이라고까지 불리는 기황후 라인이 얼마나 위세를 떨치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미파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막상 팔을 자르고 혀를 뽑겠다고 하니, 가져가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싸우다보니 제압은 했으나 그들의 거취가 참 곤란했다.
그들을 가둬놓고 나서야 티무르부카가 함부로 날뛰어 명성을 떨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힘들게 붙잡은 그들을 그냥 놓아준다고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데리고 있자니, 아미파의 이름 높은 제자들이 낙양성을 휩쓸고 다니다가 이 장원으로 쳐들어 온 뒤에 자취를 감추었다고 소문날 것 같았다.
놓아주지도 데리고 있기도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쓸데없이 권력욕심을 부리는 부천호 조정이라는 자 때문에 수백의 군사들과 그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지켜본 인근의 백성들도 수군댈 것이 틀림없었다.
우물쭈물하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간바타르! 기마에 능한 세 명을 뽑아서 스승님께 내 서신을 전해라."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설명하는 서신을 작성하고 하남행중서성에 가서 스승님의 행방을 물어본 뒤 해당 지역으로 보냈다.
사부님을 직접 만난 예순타이의 말로는 사건의 발단이 의형에게서 시작된 것을 아시고 크게 노하셨다고 전했다.
나 대신 서신을 들고 간 예순타이는 상전을 잘못 둔 죄로 그 자리에서 불호령을 들어야했다.
그가 가져온 말은 길지 않았다.
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도 들오거나 나가는 것을 막고 자신을 기다리라했다.

멸절사태 등을 제압한 날, 무기의 한독을 모두 제거했다.
대신 장무기의 대단치 않은 공력도 빼앗아버리긴 했으나 크게 상심할 수준은 못되었다.
정민군과 정현, 정허 그리고 멸절사태의 공력까지 흡수한 덕분에 공력이 매우 깊어져서 단번에 장무기의 한독을 흡수해도 감당할 수 있었다.
예순타이가 스승님의 말을 가져온 다음 날이었다.
"동생, 저번에 보니까 멸절사태의 그 칼이 부러지자마자 뭔가 챙기는 것 같던데, 뭐 대단한 물건이라도 되나?"
"아! 별 것 아닙니다. 대단한 무림비서라도 되는 줄 알고 한 번 훑어봤더니, 글쎄 구음백골조라는 음독한 무공이 기록되어 있기에 태워버렸습니다."
"그래? 그것 참 아쉽군. 검을 뽑지 않은 상태만으로도 내 칼을 종이처럼 잘라버린 검신 안에 숨겨둔 비급이면 대단한 비급일 텐데……."
전백광은 그러냐고 했으나,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어느새 칠월에 들어서서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더웠는데, 전백광의 여운이 남은 대답을 듣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방으로 돌아와 안에서 문을 걸었다.
의형제라지만, 솔직히 나누고 싶지 않은 물건이 있는 법이다.
멀리 부모자식 간에도 권력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만 봐도 유산상속으로 형제지간에 남남 아닌 남남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만약에 내게 친동생이나 형이 있어서 함께 이곳에 떨어졌다고 해도 나누길 망설일 텐데, 의형제라는 허울만 좋은 말로 맺어진 전백광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협의도를 목숨처럼 따르는 무림에 이름 높은 대협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달랐다.

그날부터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밥도 시비를 시켜 방으로 가져오게 했고 볼일도 요강을 들여놓아 그것으로 해결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무공을 연공하는 중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딱 부러지게 못을 박았다.
우간바타르 등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명씩 번을 서며 문 앞을 지켰다.
시작은 내가 바라서 발전된 관계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내 손과 발처럼 움직여주니 대단히 흡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방에 숨겨놓은 비급은 적지 않았다.
혹시라도 전백광이 훔쳐가지 않았을까 살펴봤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제 자리에 있었다.
하늘은 아니, 에디터를 이용해 내가 나에게 준 자질 덕분에 나는 불가사의한 기억능력을 지녔다.
내 몸 바깥에 존재하는 물건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도 있고 빼앗길 수도 있다.
나는 그 많은 비급들을 하나씩 외우고 모조리 불살라버리기로 했다.
그러면 이제 세상엔 오직 내 머리 속에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제일 나중에 얻은 구음진경(九陰眞經)과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등의 비급을 외우기 시작했다.
의천검 내에 숨겨놓은 비급에는 구음진경(九陰眞經)과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외에도 여러 무예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곽정과 황룡이 생전에 익혔던 수많은 무예들을 그들이 직접 익히고 연구해서 의천검에 숨겨놓은 것이다.
구음진경(九陰眞經)과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은 물론 그 많은 무예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보전들이었으나 그 외에도 하나하나 대단하지 않은 무예는 없었다.
밖에서 번을 스는 예순타이에게 화로를 가져오게 했다.
나는 한 번만 읽어도 사진처럼 기억할 수 있지만, 내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수십 번 읽고 앞으로도 뒤로도 외울 수 있고 중간에 한 글자를 찍어서 그 앞과 뒤를 자유롭게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읽은 뒤에야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을 태웠다.
때는 칠월에 들어서서 밖에 나가면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으나, 나는 방 안에서 화로를 지폈다.
밖에서 번을 스는 부하들이 열기를 느껴 방에서 어느 정도 떨어질 정도로 더웠다.
외가 절정의 무공이라는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구음진경(九陰眞經)을 수십 번 읽으면서 과연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권경(拳經)과 검리(劍理)에 대해 논한 것을 보자 마치 눈을 새로이 뜨는 기분이었다.
구음진경(九陰眞經)을 읽는 내내 그동안 여러 비급에서 읽은 지식과 티무르부카와 나누었던 수많은 격론을 통해 얻은 지식들이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곽정과 황룡이 얼마나 욕심이 많았는지 구음진경(九陰眞經)과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외에도 무려 여덟 가지의 절기를 숨겨놓는 바람에 그것을 다 외우고 태워버리자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그 다음 날은 전백광의 광풍도법(狂風刀法)과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 그리고 청성 송풍관의 송풍검법(松風劍法)을 태웠다.
이미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은 십 수 번 읽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문불출하길 삼일 째 되던 날, 수하들에게 가르치느라 연구했던 금강대력지공(金剛大力指功)과 금륜법왕의 용상반야공(龍象般若功)을 태웠다.
칩거한 지 나흘 째였다.
나는 네 권의 비급을 놓고 망설였다.

[태현경(太玄經)]
[현철검법(玄鐵劍法)]
[북명신공(北冥神功)]
[합마공(蛤膜功) 요결]

태현경(太玄經)을 읽는 순간 석파천처럼 저절로 익혀버릴까 봐 감히 펼쳐볼 수 없었다.
현철검법(玄鐵劍法)과 북명신공(北冥神功)은 내가 가장 처음 접한 무공들이라 비급에도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나는 그 날 결국, 합마공(蛤膜功) 요결을 다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비급에는 손대지 못했다.
하루 종일 합마공(蛤膜功) 요결을 읽고 또 읽다가 휘영청 달이 밝은 다음에야 한장 한장 찢어 화로에 불을 밝혔다.
다음 날은 어김없이 밝았다.
나는 현철검법(玄鐵劍法)을 집어 들었다.
태현경(太玄經)은 펼쳐볼 수 없었고 북명신공(北冥神功)은 고운 비단으로 만들어서 왠지 귀해 보여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현철검법(玄鐵劍法) 역시 그 동안 다 외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수 없이 읽었었다.
다시 한 번 읽고 나자 앞뒤로 외우는 것을 뛰어넘어 그 필체까지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을 먹기 전에 현철검법(玄鐵劍法)을 태웠다.
아침을 먹고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아주 천천히 북명신공(北冥神功)의 비급을 한장 한장 넘겼다.
삼십분도 되지 않아서 여덟 번을 내리 읽고 화로 앞에 섰다.
일단 화로 안에 들어가면 조그만 조각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모든 비급을 한장 한장 찢어서 태웠다.
북명신공(北冥神功)은 다른 무공들과는 다르게 애증이 교차했다.
그 자체로 천하제일의 신공이지만, 그 덕분에 다른 기묘한 무학을 눈과 머리로만 외울 뿐 감히 익혀볼 엄두가 나지 않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북명신공(北冥神功)의 표지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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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월드 팬들이 탄식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네요. 진짜 아깝습니다.

세상엔 나눌 수 없는 게 있죠..ㅠ

전백광 손에 들어가느니 태우는게 좋긴 하죠. 전백광이 구음진경 익혀서 난리나는 발암전개는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전백광한테는 미안한 일이네요 ㅋㅋ

그동안 정말 많이 올리셨군요
저도 더욱 열심히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화이팅!!

많이 올려도 읽는 사람은 10명도 안되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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