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4)

in #kr-writing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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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4)

자리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어색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할 정도로 어색했다.
하긴 방금 전까지 화살을 겨누고 서로를 해치려던 사이에 화해하자고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이전의 앙금이 저절로 싹 풀려버리는 것이 더 이상했다.
이런 자리엔 누군가 한 명 나서서 이끌어 줘야하는데 양쪽 모두 누가 선뜻 나서지를 않았다.
'나 이런 것 별로 안 좋아하는데…….'
결국, 주문한 술과 음식이 모두 나올 때까지 우리는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뻘쭘하지만 꾹 참고 일어났다.
"자, 자! 원한을 털어버리고 친구가 되기로 한 자리이니 모두 잔을 드시오. 모두 석잔 술로 원한을 털어버립시다."
그렇게 말하곤 좌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내가 먼저 따라놓은 석잔 술을 차례대로 원샷하고 머리 위로 잔을 뒤집어 술이 남지 않았음을 보였다.
호안민은 이번에도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으나 눈짓으로 독촉하니 어쩌지 못하고 술을 넘겼다.
"사실, 남자끼리 술을 마시는 것이 참 그렇습니다."
내 너스레가 그렇게 웃겼는지 그 때까지 비장한 표정을 고수하던 이금석의 동료 몇몇이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그들이라도 웃고 나니 분위기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저희는 아까 사과하면서 다 자기소개는 먼저 한 것으로 치고 아직 그 쪽 분들은 성함을 잘 모르겠소. 각자 일어나서 자기소개 먼저 합시다."
"보르후라고 한다. 아까 네 귀를 뚫은 사람이다."
아까 내 너스레에 웃음을 터뜨린 사람이 먼저 일어나 이름을 밝혔다.
그는 네 귀를 뚫은 게 바로 나인데, 털어버릴 수 있겠냐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순간 아까 화살이 귀를 뚫고 지나갈 때, 느꼈던 화끈함과 고통,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함이 떠올랐다.
"하! 그 신궁이 바로 이 사람이었구먼, 화살은 잘 받았소. 아니, 이놈의 화살이 어디로 사라졌지?"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보르후의 화살이 뚫어놓은 귀에 엄지손가락을 넣어 꼼지락거리며 화살을 찾았다.
다행히 그런 억지스러운 너스레가 먹혀들어갔는지 분위기는 완전히 풀려서 이제 비장한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보르후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지 아직도 조금씩 피가 묻어나오는 찢어진 귀를 술로 소독하고 약을 발라줬다.
"여러분, 남자끼리 마시려니 비싼 술을 부어도 목이 턱턱 막히지 않소? 이럴 땐 게임을 해야 되는데……."
"게임? 그게 뭔가?"
보르후가 물었다.
나는 대원제국 낙양성의 한 술집에서 삼육구 게임을 설파했다.
"저부터 오른쪽으로 돌립니다. 시작합니다. 일!"
"이!"
"삼!"
"걸렸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원샷! 원샷!"
그들은 처음 접하는 음주문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임에 서툰 이들이라 모두가 적지 않게 마셨지만, 호안민이 그 중 제일 많이 마셨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계산도 정확하던 사람이 임기응변능력이 조금 떨어지는지 게임엔 영 소질이 없었다.
우리가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아래층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올라와서 흘끗 보고 가기도 하고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올라와 한쪽 자리에 앉아서 아예 한잔 홀짝거리며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갔다.
역시 처음 보는 남자들 끼리 친해질 때는 술이 최고다.
초면에 술이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대화가 될 수가 없었다.

이금석이 물었다.
"그런데 두 분 의형제는 나이와는 안 맞게 말투가 상당히 조숙하오? 벌써 십년 앞을 내다보는 것이오?"
그제야 우리 두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전백광의 얼굴을 백날 뜯어봐야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이 시대에 와서 그의 얼굴을 처음 봤다.
사실 이렇게 바라보니, 옛날 옛적 2D게임의 조잡한 그림으로 그려진 전백광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도 마찬가지다.
이전에 그가 말하는 술자리에서 대면했다는 것은 순전히 전백광의 주장일 뿐…….
"동생, 그러고 보니 자네 상당히 어려 뵈는군."
"얼마나 어려보이우?"
“음…….”
전백광이 가늠하는데, 옆에서 우리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보르후가 끼어들었다.
"내가 맞춰보겠소."
내 귀를 뚫은 일을 응어리남기지 않고 시원스레 풀어버린 뒤로 내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내가 보기엔 고 공자는 열댓쯤 먹은 것 같고 전 형은 스, 스물…셋?"
"그렇게나 어려 보이오?"
전백광과 나는 동시에 말했다.
우리는 거울이라도 한 번 봐야겠다고 했다.
"내 얼굴이 그렇게 어려보이나?"
물론 이 시대에 고생하는 인물들이 빨리 늙어갈 것은 뻔하다.
자외선 차단제도 없을 뿐더러 자외선이 얼마나 피부건강을 해치는지 알 턱이 없었다.
게다가 화장품도 없고 세안제도 없으니 얼굴이 빨리 상할 것이다.
그러니 현대에서 심하게 관리하지는 않았지만, 천연비누로 씻고 나한테 맞는 스킨, 로션을 쓰는 내 얼굴은 매우 어려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호안민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구리로 만든 거울을 가져왔다.
"헉!"
"십년은 젊어진 것 같다."
우리는 동시에 말해놓고 웃지 않았다.
정말 십년은 어려진 것 같다.
젠장.
아마도 열다섯은 내가 어려보인다고 기분나쁠까봐 많이 쳐준 것 같았다.
아니면 이 세상에선 잘 못 먹는 바람에 열다섯의 남자아이가 현대의 열한두 살 아이만큼 밖에 자라지 못하거나…….
형제 둘이 모두 십년은 젊어진 것 같다는 말에 술잔을 기울이던 모두가 폭소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너스레를 떨거나 자신들을 웃기려고 농담을 하는 줄 알았나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고 같이 웃을 수도 없었다.
단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전백광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수백 년씩 거슬러 올라온 사람들이 더 놀랄 일이 무엇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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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낙양성에서 삼육구하는 광경은 님이 처음 묘사하셨습니다.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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