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2화 복수 01

in #kr-literature7 years ago (edited)

너에게로 가는 길.png
2화 복수
컴퓨터를 켰다.
정말 옛날에 받아놓은 의천도룡기 외전을 켰다.
귓가를 울리는 자극적인 사운드.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으로 플레이어를 중독 시킨다.
'시작합니다'를 누르자 능력치 설정 물음이 떴다.
-이소룡, 속성에 만족합니까? Y/N
갑자기 피곤이 밀려왔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아니면 자리에 앉아서 그런지 눈꺼풀이 한없이 무겁다.
예전 같았으면 N을 계속 눌러서 만족할만한 능력치가 나오고 나서야 Y를 눌렀겠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 이따 에디터를 쓰자.'
대충 Y를 누르자 웬 게임폐인이 바닥에 너부러져 '여기가 어디지? 꿈을 꾸고 있나?' 드립을 치고 옆에선 이상한 별풍선이 '당신은 선택되었습니다.'를 전개하고 있었다.
별풍선이 반짝거리던 말든 대충 스페이스바를 빠르게 눌러 대화를 흘려보냈다.
RPG게임의 핵심 룰인 '도둑질'에 따라 집안의 물건들을 털고 나와 남현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의 헛소리를 다시 빠르게 넘겼다.
이 양반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어디도 갈 수 없다.
안습인 것은 이 집엔 나침반밖에 없다…….
다음으로 턴 집은 전백광의 집이다.
그는 의자 위에 서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해면체에 물 항아리를 매달아 놓고 있었다.
신공을 무사히 연마하면 강호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가 될 수 있다나?
침대가 커야 계집 여섯 일곱 명과 같이 잘 수 있다는 말에 호감이 갔다.
"은미야! 봤지? 난 너 만나는 동안 다른 여자랑 밥 한번 안 먹었는데……. 네가 만나는 선배도 너 말고 여섯 명은 만나고 있을걸! 두고 봐라!"
나는 왜 은미 하나만 보고 살았을까?
억울하다.
나도 전백광처럼 한 번에 여러 여자 만나면서 인생을 즐겼다면 은미가 어이없이 떠났을 때, 이렇게 힘들었을까?
"이제 해바라기는 나도 안 해!"
곧 여자 구하러 가는데 같이 가겠냐는 말에 망설임 없이 Y를 눌렀다.
그의 집을 마저 털고 나와서 게임을 껐다.
피곤해서가 아니다.
에디터를 키고 무공 란에 들어갔다.
주인공은 고작 '야구권'하나만을 익혔다.
"자~ 보자. 야구권이 뭐야 야구권이? 뭘 익혀야 천하절기를 익혔다고 강호에 소문이 날까?"
무공 에디터 란에 펼쳐진 무공들은 김용의 열네 가지 소설에 등장하는 신공절학들만을 모아 놨다.
온몸이 바닥에서 4센 치정도 붕 뜬 것 같은 기분은 좋았지만, 속은 온갖 종류의 술과 안주가 뒤섞여 탈출을 위해용을 썼다.
간신히 참아내곤 모니터에 비친 무공목록에 집중했다.
어지러운 가운데도 몇 가지 눈에 띄는 무공들이 보였다.
"그래, 합마공 좋지. 모양 빠지게 야구권이 뭐냐! 합마공 당첨! 현철검법? 아, 양과! 좋아 현철검법도 당첨! 북명신공? 북명신공이 최고지. 당첨!"
마음 같아선 다 쓸어 담고 싶었지만, 희한하게 무공목록만 보면 토가 쏠렸다.
"보자 능력치? 그래 이건 나중에 게임하면서 올리면 되지. 자질이 왜 63이야? 내가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그렇지. 흥미만 있었으면 서울대감이라고! 우리 엄마한테 못 들었냐?"
자질을 최대치로 맞추고 나오자 전백광이 생각났다.
"그래, 하나뿐인 동룐데, 거지같은 광풍도법 하나로 버틸 순 없지."
인물선택란에 들어가니 무공선택란보다 더 많은 이름 목록이 떴다.
머리가 띵했다.
이리저리 흔들어 봐도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더럽고 뜨겁고 불쾌한 것이 자꾸 목구멍을 열어달라며 솟구쳤다.
"그냥 얘는 건너뛸까?"
별일 아닌데, 오기가 솟았다.
왠지 그냥 지나치는 것이 누군가에게 지는 것 같았다.
은미를 찬 것은 나였지만, 헤어지자고 말한 뒤에도 계속 내가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과 비슷하달까?
"안 져! 내가 찼다고……."
어지러운 와중에 현명신장과 금강대력지를 넣어줬다.
그때 이 게임에선 비급 없이 무공만 익히면 엄청 느리게 익혔던 기억이 났다.
"그래, 기왕 들어온 것 무공비급까지만 넣어주자. 보자, 뭐가 이렇게 많아……."
"현명신장, 북명신공, 현철검법, 합마공, 금강대력지, 다 했나? 태현경? 석파천이가 익힌 건가? 태현경 좋지. 내가 천하무적이다! 음하하하!"
내가 이런 사람인데, 왜 은미는 날 몰라줄까?
그 선배도 그렇게 잘생기지는 않았던데…….
집에 돈이 많은가?
차 있는 남잔가?
"아, 시발……. 차에서 밀렸구나."
그만 나오려는데, 무기, 영약이라는 글자가 눈을 잡았다.
"여기선 돈이고 차고 다 쓸데없어! 현철중검, 연위갑……."
졸음이 쏟아졌다.
도저히 참기가 어렵다.
이대로, 이대로 자면 안 돼.
"또 까이고 싶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에디터 화면을 보면 졸음이 쏟아질 것 같아 다시 게임으로 돌아왔다.
길을 따라가다 복위표국에 다다랐다.
조용히 집안의 재물을 쓸어 담아주곤 허접스러운 임평지 놈을 때려잡았다.
길을 따라 걷다가 하락객잔에 다다랐다.
객잔 앞에 보따리장수가 보였다.
'위소보?'
그에게서 용상반야공을 구매하고 응벽검까지 사려는데 돈이 모자라단다.
"아, 돈 에디터를 깜빡했네……. 빙백은침이라도 사야겠다."
빙백은침 두개를 사고 나자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됐다.
"더는 못 사나?"
이제 돈이 없다는 사실이 왠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구나."
서러움이 점점 차올라 나를 통째로 가라앉혀버렸다.

춘기는 모니터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들기 전까진 억지로 구역질을 잘 참았지만, 의식이 저 나락 속으로 떨어지자 어떤 것도 의식적으로 막지 못했다.
그의 입에선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무언가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중 일부분은 그의 침과 같은 체액이었지만, 상당부분은 인간의 몸으론 생성해낼 수 없는 알코올성분이 주를 이루었다.
도대체 뭘 얼마나 처먹었는지 쉴 새 없이 토해낸 그의 토사물은 마침내 책상을 타고 넘어 범람했다.
책상을 타고 내려간 그것은 문어발식으로 연결된 콘센트로 흘러들어갔다.
곧이어 콘센트는 번쩍거렸고 춘기는 덜덜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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