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19)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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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19)

나는 본의 아니게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연공하다가 구경하던 시비와 하인들을 중증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얼마 전부터 이들을 위해 간단한 수화를 만들어서 글을 아는 집사 이헌에게 가르쳤더니, 어느새 모두가 수화를 사용했다.
아마 나보다 자신들이 더 간절했으리라.
나는 옆에서 차를 나르는 시비(侍婢)에게 그들을 안내하라고 수화로 뜻을 전했다.
"그것 참 신기하구나.
신기하기는 하나 어찌 하찮은 것들을 위해서 정력을 소비하느냐?
이미 그들에겐 충분한 보상을 제공했으니 너는 앞으로 그들에게 신경 쓰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앞으론 촌각도 아끼고 아껴서 무학에 정진해야 한다.
아직 어려서 시간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겠지만,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나면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들에겐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티무르부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내 손에 남들이 보지 못하게 가린 후 소(小)자를 썼다.
"그것만 제외하곤 뭐든지 가르쳐도 좋다.
앞으로 대도에 가면 천하각파의 무예를 섭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가르쳐봐라.
저들은 이미 군적에서도 빠졌으니, 군인을 만들 생각 말고 네가 쓰도록 해라.
공력을 이룬 것에 대한 선물이다.
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유용하게 써라."
공력이라 함은 무상공력(無相功力)을 가리키는 것이다.
험한 세상이니 믿을 수 있는 아랫사람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써주는 스승님께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갔으나 일어나 나를 맞이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세 명은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고 다섯은 죽일 듯 노려봤다.
스승님 앞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저들이 보기엔 내가 자신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개자식이 아니겠는가?
"고춘기라고 합니다.
비록 과거에 안 좋은 추억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옛 기억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용기내서 먼저 인사했지만, 누구도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에게서 티무르부카만 아니면 갈아 마셔버리고 싶다는 텔레파시가 쉬지 않고 날아오는 것 같았다.
"스승님께서 여러분을 상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군적에서도 빠졌으니 군인을 만들어 돌려보낼 생각일랑 하지 말고 유용하게 쓰라 십니다."
그들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졌다.
마치 티무르부카라는 신이 자신들에게 운명의 굴레를 씌운 듯 절망에 빠진 얼굴들이었다.
도대체 티무르부카는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걸까?
그의 이름만 나오면 그들은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배울 마음도 의지도 없는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사람이 아닌 남에게 귀한 무공을 가르쳐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스승님께 말씀드려서 해가 가지 않도록 조취를 취하겠습니다.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지난 일은 저의 일방적인 잘못은 아니지만, 저는 이렇게 멀쩡하고 여러분은 크게 피해를 입었으니 모자라나마 금전적인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놀라움이 떠올랐다.
지난 십오 년 동안 그들은 티무르부카가 한 말을 뒤집는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티무르부카의 가르침을 받아온 대제자 마두징(馬斗徵)조차도 스승이 아니라 마치 주인을 모시 듯했다.
유독 황제가 자주 바뀌는 원 황실이었다.
피바람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이렇다 할 계파도 없이 사십 년을 홀로 버틴 유일한 환관이 바로 티무르부카다.
그들 중 우간바타르는 티무르부카의 이 제자로 들어간 계사일(桂思逸)과 친구지간이었으므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들을 수 있었다.
"흥! 아무것도 모르는 골빈 녀석이군.
네까짓 게 뭔데 감히 태감께서 결정하신 일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다는 말이냐?"
훈비쉬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토해냈다.
"스승님께선 저를 매우 아끼십니다.
적절한 이유를 들어서 설득하면 응낙하실 겁니다."
"흥! 개소리!"
훈비쉬는 콧방귀를 끼더니 아예 얼굴을 돌려버렸다.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아예 상대를 하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음~ 그러면 제가 먼저 스승님께 허락을 받고 올 테니, 그때까지 떠날지 아니면 남아서 제게 충성을 맹세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고 돌아서려는데, 처음부터 일어서서 나를 맞이한 사람이 말렸다.
"나는 우간바타르요.
당신이 태감님을 스승으로 모신 게 겨우 두 달 남짓인 것 같은데, 누굴 가르친다는 거요?"
우간바타르는 티무르부카의 제자로 들어온 오백 정병 중에서도 궁전, 기마, 투창, 마상무예까지 모든 면에서 능통했고 무예로 꼽자면 한손에 드는 고수였다.
이 중에 가장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도 우간바타르였다.
그의 생각은 다른 여덟 명의 생각과 동일했다.
불과 두 달 전만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던 고춘기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한 마리 활강하는 매처럼 날랬던 전백광이 고춘기의 자리에 서서 같은 말을 했다면 이들의 대응은 어느 정도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들 생전에 그렇게 빠른 사람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들이 티무르부카와 그의 두 제자의 진정한 실력을 알았더라면 전백광을 보고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춘기는 입을 열어 말하는 것으로는 이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뜬금없이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모아 꽃봉오리 모양을 만들었다.
이내 꽃봉오리를 살짝 털어낸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내렸다.
"모두 일어나셔서 옆구리를 확인해보세요."
모두들 옆구리에서 뻥 뚫린 구멍을 세 개씩 발견할 수 있었다.
뜬금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줄 알았더니, 그 사이에 왼손을 스물일곱번이나 튕겨낸 것이다.
점화지력(點花指力)이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는데도 누구도 다친 사람은 없었고 아무도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점화지력(點花指力)은 교묘하게도 그들의 옷만을 버려놓았다.
"두 달 동안 많이 배우진 못했어요. 그럼 생각들 해보세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고 뻥져 있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속이 시원해졌다.
우간바타르는 티무르부카의 둘째 제자인 계사일(桂思逸)로부터 이런 공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약 이 년 전 오랜만에 만난 계사일은 자신이 재미난 재주를 보여주겠다며 고춘기가 보인 것과 같은 공부를 보여주며 점화지(點花指)라고 했다.
그것은 본래 소림에서 나온 무공으로 오른 손을 한 번 털 때마다 왼손을 한번 튕기는 공부였는데, 오랜 세월 자신의 사문에서 계승 발전시켜서 오른 손을 한번 털 때 왼손으로 몇 번이든 튕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계사일은 오른 손의 이슬을 한 번 털 때, 왼손을 다섯 번 튕겨냈으며 그러한 자신의 재주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 공자. 대단한 점화지(點花指)였소. 아마 태감님의 제자 중 이 재주는 고 공자가 제일 뛰어날 것이요."
"과찬이십니다. 위로 두 분의 사형이 계시는데, 어찌 제가 제일을 논하겠습니까?"
"아무튼, 그대의 재주가 비범한 것을 알았으니 됐소. 굳이 태감님께 밉보일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나는 남아서 그대의 가르침을 받겠소."
그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맞잡았다.
"우간바타르가 주인을 뵙습니다. 앞으로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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