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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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5)

그는 고춘기의 해명을 듣고 나서 한편으로는 그를 위로하면서 정민군에게 다가갔다.
"호! 동생, 대단하군. 점혈수법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녀의 무공을 폐해버렸군!"
"정말입니까?"
장무기는 놀라서 전백광처럼 정민군의 완맥을 잡아보았으나, 맥을 잡는다고 상대의 내부를 알아낼 재주는 없었다.
"동생. 정말 감탄했네. 이 폐혈공부도 자네 사문의 것인가?"
전백광은 정말 놀라운 마음에 호기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삼봉과의 대결을 직접 목도하고는 티무르부카의 무공이 천하에 다시없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일전에 있었던 그와의 안 좋은 기억과 환관이라는 특이한 신분 때문에 그가 두렵다는 생각은 있었어도 존경하는 마음은 일지 않았다.
그런데 고춘기의 폐혈수법을 보자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얼마나 감탄했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닙니다. 가전무공입니다. 보기와 다르게 크게 대단할 것 없는 공부입니다."
"그, 그런가?"
전백광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동생에게 아들로 받아달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는 정말로 고춘기의 귀신같은 폐혈공부를 배우고 싶었다.
"이 공부는 저희 가문 특유의 내공심법을 배우지 않으면 익히실 수 없습니다. 한 번이라도 다른 내력을 지녔다면 불가능합니다."
고춘기는 전백광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딱 잘라서 못 박았다.
"그렇지? 하긴 그렇게 대단한 수법을 아무나 익힐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애써 거기에 맞장구 쳐줄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떤 사과로도 화가 안 풀리시겠지만, 할 수 있다면 제 능력이 닿는 선에서라도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이! 이!"
정민군은 온몸에 힘을 잃어버리자, 단지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묘한 점혈공부에 당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백광이 멋대로 손목을 잡고 무공이 폐지되었다며 감탄하자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그녀는 단지 이들이 자신을 데리고 장난치는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다 고춘기의 진지한 사과를 듣자 무공이 폐지된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민군은 뭐라고 말을 이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패금의가 떠올랐다.
패금의는 엄한 사부님 앞에서 감히 거짓을 입에 담을 만큼 야무진 사람은 못되었다.
그러니 곧 불같이 화가 난 사부님이 달려오실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이렇게 침상 위에 누워 맞이한다면 어찌된 일인지 해명해보지도 못하고 내쳐질지도 몰랐다.
그녀가 힘겹게 일어나려하자 바로 옆에 있던 장무기가 그녀를 부축했다.
장무기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그녀는 서둘러 이 방을 떠나려했다.
고춘기가 다른 편에 서서 그녀를 부축하려했으나 정민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뿌리쳐버렸다.
꽝!
뭔가가 터져나가는 굉음이 울렸다.
바닥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고춘기는 별안간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감을 깨닫고 현철중검을 들었다.
정민군을 앞질러 뛰쳐나간 고춘기와 전백광이 본 것은 전쟁터였다.
대문은 문채로 넘어졌고 십여 명의 무리들이 쳐들어와 사십대 중반의 여인을 둘러싸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들은 잇따라 날아오는 화살을 어렵지 않게 쳐냈다.
우간바타르 등 아홉 명의 부하들도 대문이 떨어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각자 전각 사이에 숨어서 화살을 날렸다.
누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으나, 신속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과연 몽골기병 출신다웠다.
"정민군! 당장 나와 무릎 꿇지 못하겠느냐!"
십여 명에게 둘러싸인 중년의 여인이 소리쳤다.
고춘기는 그녀의 외침에서 심후한 내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정민군? 아미파였나?'
그는 어렵지 않게 정민군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항상 악역을 자처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은미도 자신에게 마지막엔 악역으로 남았던 것을 생각하면 관상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맞는 면도 있지 않나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쏟아지는 화살 비를 뚫고 쓰러질듯 말듯 비틀거리며 중년 여인 앞으로 뛰어가는 정민군을 보고서야 상념을 지울 수 있었다.
"우간바타르! 멈춰라! 사격 중지!"
아슬아슬하게 정민군을 피해 날아가던 화살이 뚝 그쳤다.
"사부님! 패금의가, 패금의가 오해한 겁니다."
정민군은 어느새 중년의 여인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소인 고춘기가 아미파 장문 멸절사태께 인사 올립니다."
오해의 발단을 제공한 장본인인 고춘기는 매우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가까이서 보니 중년의 여인은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단지, 아래로 비스듬히 쳐진 눈썹 끝이 으스스한 느낌을 풍기는 것이 아쉬웠다.
그녀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제가 아는 분과 귀파의 제자분이 너무 닮아 오해가 있었습니다.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으며 정소저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 나무라지 마십시오.
이렇게 허리 굽혀 사죄드리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십시오."
"본파의 일은 본파에서 알아서한다.
감히 너 같은 아이가 끼어들어 감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멸절사태의 곁에서 화살을 막아내던 서른 살가량의 깡마른 사내가 나서서 고춘기를 나무랐다.
"민군, 팔을 걷어보아라!"
멸절사태는 고춘기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정민군을 추궁했다.
아미파는 본래 제자를 받으면 사부가 직접 제자의 팔에 수궁사(守宮砂)를 찍어주는 전통이 있었다.
남녀로 이루어진 아미파에선 결혼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아미파를 세운 곽양 때부터 순결을 지키는 여제자에게만 가장 심오한 무공을 전수해왔다.
정민군은 눈물을 쏟아내느라 엉망이 된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매를 걷는 것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기어코 소매를 걷어들었다.
그녀가 걷어 올린 소매 안에서 선명하게 붉은 색깔의 수궁사(守宮砂)가 들어났다.
"민군, 일어나라."
멸절사태는 정민군의 수궁사를 확인하고 나서야 서릿발 같은 기색이 누그러들었다.
공력을 모두 잃어 기진맥진한 상태로 죽기 살기로 달려온 정민군은 한차례 눈물까지 쏟아내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이 달려 몇 차례나 주저앉아버렸다.
멸절사태의 여제자인 조영주와 이명하가 정민군을 양쪽에서 부축하고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멸절사태는 그 모습을 보고서 이상함을 느꼈다.
정민군은 아미파의 대사저로써 제자들 중 기효부를 제외하곤 무예가 제일 뛰어났다.
그런 그녀가 눈물을 좀 쏟아냈기로서니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보자 심히 걱정이 되어 직접 맥문을 잡았다.
"민군. 어쩌다가 공력을 모두 잃은 게냐?"
"사부님. 저자가 사술을 부려 제 무공을 폐지시켜버렸습니다."
멸절사태가 자신이 무공이 폐지된 사실을 다시 확인해주자 서러움이 북받친 정민군은 여러 사제들 앞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멸절사태는 정민군의 상세를 유심히 살펴보아도 당최 어떤 방법으로 그녀의 무공을 폐지시켰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고춘기를 유심히 훑어보았으나 정민군을 제압하고 무공을 폐지할 만큼 대단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우. 내가 전부터 말하지 않았나?
미인은 비구니 중에 있다고."
전백광도 멸절사태의 심후한 내력이 깃든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 자명한데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오히려 그녀 자태를 찬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예전부터 비구니를 탐하는 못된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랬으니, 색마로 낙인찍혀 공적이 된 것이겠지.'
"부처님께서 너무 욕심내시는 것 아닌가!
천하의 미인들을 다 데려가려하다니.
비구니로 늙기엔 참으로 아까우이."
"형님, 말씀이 심하시오. 저분은 아미파 장문인 이신 멸절사태로 천하에 이름 높은 고수요."
"아니, 비구니가 예뻐서 예쁘다는데, 그것도 죄가 되나?"
슬그머니 눈치를 주는데도 이 양반은 못 알아먹고 오히려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런 이야기는 둘이 있을 때 합시다. 자리가 좋지 않소."
멸절사태는 공력이 심후하여 전백광이 대놓고 떠드는 소리뿐만 아니라 고춘기가 조용히 소곤대는 소리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어린 것들이 부녀자를 납치하고 함부로 무공을 폐하다니, 음탕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정현!"
멸절사태의 외침에 대답한 것은 사십대 여인으로 키가 전백광보다 한 뼘은 커보였다.
게다가 몸집이 우람해서 웬만한 장정보다 나았다.
"무공을 폐하고 오른 팔을 잘라 무림에 정기를 바로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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