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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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4)

이전에 전백광이 남녀 간의 내밀한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오랜만에 아쉽게 헤어진 은미를 보고 아련하고 반가운 마음이었던 고춘기는 정민군이 진실을 밝히라고 말하자 어이가 없었다.
"무슨 진실을 밝히라는 거야?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 게 뭐야?
네가 김진수 그 자식하고 팔짱끼고 다니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단 말이야?"
정민군은 더 당황해서 패금의를 돌아보았다.
거듭된 폭로에 패금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저, 이 일이 어찌된 일이에요?"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이, 이놈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정민군은 부정했으나 패금의의 의심 짙은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이 악적! 빨리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겠어!"
정민군은 고춘기의 뺨을 후려치려했다.
고춘기는 지난 두 달간 전심전력으로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연마했고 요사이 밤마다 점화지(點花指)를 연공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 무공이 상당히 진보했다.
그는 정민군이 뺨을 후려치려하자 본능적으로 그 손목을 잡아챘다.
공교롭게도 고춘기의 엄지손가락에 자리한 소상혈과 정민군의 손목에 위치한 열결혈(列缺穴)이 마주 닿았다.
정민군은 자신의 내력이 손목 부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경한 그녀는 힘을 더해 손목을 빼내려했다.
그러나 그녀가 힘을 더할수록 더 많은 내력이 고춘기의 소상혈로 유입되었다.
고춘기는 북명신공에 의해 저절로 정민군의 내력이 흡수되는 것을 느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자신을 타박하는 그녀의 말과 행동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가 만약 손을 놓는다면 당장 뺨이라도 한 대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배반한 그녀에게 뺨까지 맞는다면 화를 참지 못하고 후회할 짓이라도 저지를까 두려웠다.
"사저! 어찌된 영문인지 해명이라도 해보세요."
패금의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막역한 사이였던 자신에겐 언질도 없었던 기효부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한편 어린 나이에 숨어서 아이를 키우며 혼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생각하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기효부가 안쓰러운 만큼 정민군이 너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굳이 혼자 알고 덮을 수 있는 일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추격당하게 하다니 동문으로써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연인을 숨겨둔 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까지 만났다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후안무치(厚顔無恥)할 수 있나!
기효부에게는 그렇게 칼 같은 잣대를 대더니, 정작 자신은 그보다 더 파렴치한 과거를 숨기고 있지 않은가?
패금의는 정민군을 추궁해서라도 진실을 알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정민군은 옛 연인에게 손목이 잡히자 입에 풀칠이라도 한 듯 아무런 변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사저, 당신은 남자를 바꿔가며 만났으면서 어떻게 효부에겐 그렇게 냉정할 수 있었나요?
같은 여자로서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 때문에 쫓기고 있는 기효부를 생각하니, 패금의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마치 자신이 기효부라도 된 것처럼 따지고 들었다.
정민군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엄청난 속도로 내력이 사라지는 와중이라 감히 입을 벌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 고춘기는 허죽이 왜 그렇게도 북명신공을 후대에 남기기를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과거 이제 부하가 된 아홉 명의 공력을 흡취할 때와 티무르부카의 소무상공(少無相功)을 흡수할 때는 북명신공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본문에서 지난 이백오십 년 간 복원하고 발전시킨 역근경(易筋經)보다 뛰어나다는 소무상공(少無相功)도 이 정도의 내력을 이렇게 순식간에 증진시켜 줄 수는 없었다.
지난 두 달간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직접 익힌 고춘기는 그제야 북명신공이 그 어떤 내공심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배임을 깨달았다.
정민군은 이내 모든 공력을 빼앗기고 탈진해서 주저 앉아버렸다.
고춘기는 주저앉는 그녀가 다치지 않게 품에 안았다.
"사저, 내 앞에서 어찌 이럴 수 있나요?"
패금의는 자신이 보는 자리에서 태연하게 옛 연인에게 안기는 정민군을 보고 소리쳤다.
정민군은 이미 탈진하여 도저히 입을 뗄 수 없었다.
패금의는 도저히 이 광경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자리를 뛰쳐나갔다.

패금의는 장원을 뛰쳐나와 곧장 아미파의 추격대가 모이기로 약속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이미 멸절사태를 비롯해 모두가 모여 패금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기효부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냐?"
"아니, 그게……."
패금의는 그제야 기효부의 행방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정민군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사부 멸절사태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감히 그녀 앞에서 정민군과의 동문으로써의 마지막 남은 의리를 지킨답시고 둘러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이리 우물쭈물 대는 게야?"
멸절사태의 엄포에 결국, 패금의는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패금의가 뛰쳐나가자 정민군은 계속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이미 탈진한 정민군의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방 안 사람들 중 오직 고춘기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야?"
고춘기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괴리감을 느껴야했다.
분명히 얼굴은 자신을 버리고 김진수를 택한 은미와 다르지 않았는데,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태도, 말투가 전혀 달랐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녀가 너무 무거워졌다.
온몸이 근육으로 잘 짜여서 겉으로 보기엔 날씬했지만, 실제 무게는 웬만한 성인남성 못지않았다.
게다가 팔다리 할 것 없이 모두 돌덩이 같았다.
'은미는 힘든 운동을 싫어해서 항상 자기는 운동 안 해도 날씬하다며 끼니를 거르곤 했는데…….'
은미는 절대로 이런 수준으로 몸을 만들 사람이 아니다.
'그럼 이 여자는 누구지?'
그제야 그녀와 뛰쳐나간 여자가 나누었던 말과 당황하던 표정 따위가 하나가 되어 그의 뇌리를 때렸다.
'두 달 만에 이런 공력을 연마할 수 있을까? 근육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던 몸을 이렇게 만들면서?'
그는 징그러운 뱀이라도 떠안은 것처럼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한 생각이 들어 온몸을 떨며 안고 있던 여자를 밀어내버렸다.

패금의는 정민군이 스스로 고춘기에게 몸을 맡긴 것으로 알고 뛰쳐나갔으나, 옆에서 지켜보던 전백광은 다르게 보았다.
전백광은 고춘기가 단지 손목을 잡은 것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해버리자 그의 점혈수법이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고명한 경지에 올랐다고 여겼다.
그 동안 누구에게도 북명신공의 존재를 공유하지 않았던 고춘기였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 한 명인 전백광조차도 이런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전백광은 언제 점혈을 했는지 낌새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는데, 그녀는 마치 탈진이라도 한 사람마냥 주저 앉아버렸다.
의동생의 대단한 발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데, 짧은 순간에 안색이 수십 번이나 변하는 고춘기를 보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고춘기가 그토록 다정하게 대하던 여인을 마치 징그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부르르 떨며 털어 내버리는 것을 보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놔두면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아가씨가 크게 다칠 것 같았다.
전백광은 바람처럼 침상 위의 이불을 당겨 쓰러지는 정민군을 받아들곤 바로 침상에 내려놓았다.
남녀 간의 문제는 오묘해서 다른 동성이 아주 작은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불화가 생기는 것을 알았던 전백광은 최대한 정민군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했다.

"너는 은미가 아니구나."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생기를 잃어버리는 고춘기였다.
그 안색이 너무 침중하여 전백광이나 장무기가 쉽사리 어떤 위로의 말을 꺼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고춘기는 자신과 은미가 함께 타임슬립이라도 한 줄 알았다.
말도 안 돼는 일이었지만, 본래 그가 처한 상황이 말이 안 되질 않나?
그런 상황은 제쳐두고라도 그것이 현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그의 총명한 안목을 가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아버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신을 가두고 강제하는 인물이었다면 은미는 그와는 정반대 쪽에 선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난 고춘기가 느꼈던 자유, 즐거움, 여유, 사랑 모두가 그녀와 함께했었다.
그가 비로소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던 은미는 그에겐 남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과 함께 이곳에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은 그의 무의식중에 막연한 기대로 존재했을 뿐, 한 번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민군을 보자 갑자기 튀어나와 의식을 지배하려했다.
정민군의 격렬한 반응과 정민군은 채울 수 없는 은미와 정민군 사이의 이질감 덕분에 의식하지 못했던 무의식과 대면한 고춘기는 충격에 휩싸였다.
돌이켜보니 자신의 행동이 전혀 자신답지 않았다.
그는 오래지 않아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정말 많이 닮았군요."
"아, 그런 거였나? 동생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게. 내 다음엔 꼭 자네가 아는 그녀를 데려다주겠네."
전백광은 고춘기가 오해라도 할까봐 일부러 정민군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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