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

in #kr-writing7 years ago

너에게로 가는 길.png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그냥은 못 보내주겠다고?
두 명을 상대하려고 서른 명이 폭탄까지 가져온 주제에 명예라고?
"허나, 그대가 먼저 화해를 청해왔고 그대와 우리는 고려인이다. 그대의 의형이라는 저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우리를 따라가서 함께 화해의 술잔을 기울이고 친구가 될 용기가 있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전백광을 돌아봤다.
그는 사과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계속 독촉하는 내 의견을 결국 받아들였다.
"전백광이오. 내가 손이 과했소. 허리 굽혀 사죄드리리다."
전백광은 들고 있던 몽고 기병 우간바타르와 훈비쉬를 조심히 내려놓고 땅에 닿을 듯 깊이 허리를 숙여보였다.
그러자 이금석은 갑자기 왼손을 높이 들었다.
전백광과 나는 돌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멀리에서 우리를 중심으로 원운동 하던 무리들에게서 화살이 날아올 것 같았다.
전백광은 얼른 바닥에 내려놓은 몽고기병 우간바타르와 훈비쉬를 주워들었다.
이윽고 이금석이 손을 내리자 멀리서 우리를 겨누던 스무 명의 몽고기병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활과 화살이 쥐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전백광과 나는 화살받이용으로 들었던 몽고기병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이금석은 일련의 상황을 설명하고 기절한 일행을 점검했다.
그러는 중에 몇몇 몽고기병은 말을 타고 몇 마리 주인 없는 말을 몰아왔다.
"타시게. 이 벌판을 걸어갈 수야 없지 않겠나?"
몽골기병 한 사람이 여러 필의 말을 몰고 다닌다더니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그럼 또 신세지겠소."
전백광은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올라탔다.
나는 부끄럽게도 혼자서 말에 올라본 적이 없었다.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 짧은 구간이지만 시승해보긴 했으나 올라설 때 관리하는 분이 도와줘서 겨우 올라갔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이금석이 다가와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목숨을 걸고 당당히 맞섰던 상대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인가!
부끄러운 마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금석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의도를 깨달은 나는 얼른 이금석의 손을 밟고 말에 올랐다.
"고맙다."
전백광에 이어 나까지 말에 오르자 환자들도 모두 말 등에 실렸다.
"전백광, 저자도 그대들과 의형제 사이인가?"
"아니요. 저자는 호안민이라는 사람으로 이 주루에서 일하던 점소이요."
"그대들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내 뜻대로 해도 되겠군."
이금석은 지하실 입구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호안민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잠깐! 우리가 화해하는 마당에 불길하게 피를 봐서 좋을 것이 뭐 있소?"
"그대와 관계없는 자라면 상관 말게. 저 놈은 우리와 아무런 은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쓰러진 내 형제들을 짓밟았네."
호안민의 기지로 진천뢰 세례 속에서 목숨을 부지한 전백광이 말려봤지만, 따지고 보면 이금석의 말이 옳았다.
전백광과 고춘기는 의형제였으니 전백광이 부른 싸움을 함께 참여했지만, 호안민은 그렇지 않았다.
눈치 빠른 호안민은 재빠르게 전백광 앞으로 달려와 무릎 꿇고 말했다.
"대인,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마소와 같이 일하겠습니다."
당황해서 살려달라고 비는 호안민과 한껏 당긴 시위를 당장이라도 놓을 것 같은 이금석을 보며 어찌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동생, 어찌하면 좋겠나?"
"호형도 원한이 있소."
뜬금없는 내 말에 호안민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의 안색이 그렇게 대번에 바뀐 것이 의아했으나 일단,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저 놈과 우리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단 말인가?"
이금석은 화살을 거두지도 않고 호안민에게서 눈을 거두지도 않은 채 물었다.
"이형과 형제들이 호형이 먹고 살던 주루를 폭파시켜버렸으니 그는 이제 살길이 막막하게 됐소. 사정이 그런데 어찌 원한이 생기지 않았겠소?"
나는 이금석에게 말하면서도 호안민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내 말을 듣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원한을 풀고 화해하러가는 길이니, 이형이 술잔 하나를 더 준비하고 호형은 좀 전의 일을 사과하는 것이 좋겠소."
이금석은 잠시 생각하는 양 긴장을 늦추지 않더니 이내 화살을 거두었다.
"이 호(胡)가가 살길이 막막해져 대인들께 무뢰를 범했습니다. 천한 놈이 아는 것이 없어 그랬으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호안민은 이금석 등을 향해 절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폭탄이 터져도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전후사정을 모르고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무슨 말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만큼 떨렸고 더듬었으며 울먹거렸다.
심지어 말 위에서 보는 우리가 민망할 만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됐다. 절은 그만해라. 전백광, 그대가 이자를 받아준다면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그리하겠소. 안민, 내가 받아주겠네."
이금석은 전백광의 말을 듣고 나서야 우리 앞에 주인 없는 말 한필을 놔두고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호안민은 끊임없이 절을 하다가 머리를 땅에 박은 자세로 일어날 줄 몰랐다.
"안민, 일어나게. 이제, 살았으니 힘을 내게."
전백광은 말에서 내려 호안민을 직접 일으켜주었다.
나는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호안민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지만, 내가 보기엔 두려워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우리를 앞서나가는 이금석 일행을 노려보는 호안민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전혀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금석 일행과 전백광은 그가 두려움에 떨었다고 믿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와 전백광과 이금석 일행이 맺은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된 그런 원한이 있는 것 같았다.
"동생, 동생 덕분에 살았네. 안민, 동생에게 인사하게."
"감사합니다. 고 공자."
"아직, 안심할 수 없습니다."
내게 절을 하려는 호안민을 손을 들어 말렸다.
"무슨 소린가? 이제 화해주를 마시며 탈탈 털어버리는 일만 남은 것 아닌가? 어찌됐든 간에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니 좋은 일이 아닌가?"
"아닙니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으나 고 공자의 말대로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역시 호안민은 설명하지 않아도 내 의중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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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잘 읽고갑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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