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1)

in #kr-literature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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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궤도(詭道) (1)

고춘기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살벌한 협박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몽고기병은 몇마디 협박으로 고춘기에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쉽사리 벗어나기 어려운 공포를 안겨주었다.
무거운 현철중검과 왼손에 화살받이 용도로 멱살 잡힌 채로 들린 두 명의 몽고기병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몽고기병의 협박으로 공황상태에 빠지려는 고춘기의 정신을 지탱해주었다.
"네가 오백 년 동안 말을 타고 천지사방을 헤매도 내 가족을 찾아낼 수는 없다."
"내 친구의 목이 하나 땅에 떨어지면 그들을 묻은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너희 남인(南人) 천 명의 목도 땅에 떨어질 것이다."
"흥!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의 목숨 가지고 날 협박하려하지마라."
"자신의 뿌리까지 부정할 셈이냐? 이 더러운 한족(漢族)놈아!"
"누가 한족(漢族)이라는 거냐?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여기가 원나라 때라면 대한민국은커녕 대한제국도 없었고 조선도 생기기 전이다.
"굳이 따지자면 내 아버지가 고려 사람이었으니, 나도 고려인이다."

"고려 사람이라고?"
알탄은 소년을 찬찬히 살펴봤다.
비록 변발을 하지 않았고 복색도 남인의 복식을 따랐으나 생긴 것은 한족과 구분되었다.
소년에게서 이유 없는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 자신들과 비슷한 얼굴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비록 생김새는 고려인과 비슷하다지만, 복식이나 귀를 뚫지 않은 점 등을 미루어보면 의심할 여지는 남았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초면에 왜 반말이냐? 남의 이름을 물을 때, 제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어린 녀석이 너무 당당하다.
남인이나 한인 신분의 미천한 아이가 감히 몽고기병을 대함에 있어서 이렇게 당당하게 반말을 지껄일 수 있을까?
알탄은 의복과 행동이 어울리지 않는 이 아이에게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내 이름은 알탄, 고려이름은 이금석(李金石)이다."
"고춘기(高春基)다."
"고(高)씨라고?"
공교롭게도 소년은 현 조정의 실세인 전(前) 자정원사(資政院使) 투만티르의 성과 같은 성을 썼다.
"전(前)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공(公)과는 어떤 관계냐?"
고용보는 고려 출신 내시들의 우두머리로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 황실의 제 2황후에 오르도록 힘쓴 일등공신이었다.
그 공으로 기황후는 황후직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고 고용보에게 맡겼다.
자정원을 중심으로 상당한 정치세력이 모여들어 자정원당으로까지 불리는 마당에 혹시라도 고용보와 관계있을지 모르는 소년에게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웠다.
비록 작년에 날개가 꺾이는 바람에 자정원사(資政院使) 자리를 내놓은 지 오래였으나 아직도 위세가 당당해서 승상이나 친왕들까지도 찾아가 절을 할 정도였다.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 없다."
고춘기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알탄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앞뒤 시비가 어찌되었건 고용보와 관계된 이에게 화살을 쏜 것은 뒷감당하기 어려웠다.
"너는 고려인이면서 왜 만쯔다이(남쪽오랑캐: 중국인)와 어울려 다니며 동족들을 상하게 하느냐?"
"그대들이 고려인인줄 몰랐다. 의형이 나를 위하는 마음이 크다보니 실수를 했다. 아직 양쪽 모두 죽거나 크게 상한 사람은 없으니 이쯤에서 화해했으면 한다."
알탄은 어이가 없었다.
이쪽은 서른 명이나 배에 바람구멍이 뚫렸는데, 크게 상한 사람이 없다니!
저 둘은 정말 크게 상한 곳이 없어보였다.
"그대는 정말 용봉(龍鳳) 공(公)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가?"
용봉(龍鳳)은 자정원주 고용보의 별명이었다.
고춘기는 역시 아는 바 없다고 했다.
알탄 머리에 순간 많은 상념이 스쳤다.
내세울 배경조차 없는 소년이 저렇게 당당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스무 명의 몽고기병이 멀리서 원을 그리며 돌며 활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신출귀몰한 사내도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판에 소년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소년은 모른다고 했지만, 계속 고용보가 마음 한편에 걸렸다.
비록 고용보가 작년 탄핵을 당해 고려의 금강산까지 쫓겨났지만, 1년도 안 돼 다시 불러들였을 정도로 기황후의 신뢰가 두터웠다.
하지만, 단지 마음에 걸린다고 형제들을 상하게 한 자들을 몇마디 말로 화해하고 보낼 수는 없었다.
그를 포함한 서른 명의 탐마적군 모두가 적게는 십년 많게는 십오 년 이상을 함께 동고동락하여 친형제와 다름없었다.
'궤도(詭道)다.'

자신을 이금석(李金石)이라고 소개한 몽고기병은 자꾸 '고(高)'씨 성을 가진 이름들을 나열하며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나를 떠보는 것일까?
진짜로 유력자들의 이름인가?
아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버지?
숙부?
번민이 넘쳤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블러핑도 뭘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생각에 잠긴 이금석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초조함이 지나쳐 고춘기는 차라리 빨리 싸우고 끝내자고 말하려다 몇 번이나 참았다.
그렇게 입을 열었다간 마지막에 바닥에 눕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 뻔했다.
"그대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상하게 만들었다. 크게 상한 사람이 없다고 했으나 우리는 모두가 큰 부상을 안고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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