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6)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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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6)

그녀는 멸절사태에게 목례한 뒤 검을 뽑아들었다.
정현사태는 고춘기 앞에 서더니 입을 열었다.
"칼을 뽑아라. 무기도 들지 않은 자를 베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전백광이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주인! 허락해주시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우간바타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잃어버린 내력을 다 찾지도 못한 상황이라 지금 아미파의 인원들 중 멸절사태를 제외하고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정현사태와 상대하라고 내보낸다면 별다른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됐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그러면서 현철중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아직 누구와도 칼끝을 마주 겨눠 본 적이 없었다.
현대에서 조직폭력배이거나 군인 같은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사람에게 칼을 겨누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연한 일이지만, 고춘기도 누군가에게 칼을 겨누어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정현사태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자 칼끝이 얼마간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현철중검을 쥔 손에서 자꾸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점화지(點花指)보다 현철검법에 치중할 것을…….'
뒤늦게 후회해봤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정현은 자세를 가다듬고 서서히 자신에게 검을 뻗어왔다.
정현의 검은 좌우로 연달아 휘둘러댔는데, 그 동작이 기이하게 빨라서 눈으로 쫓기도 어려웠다.
멸절사태는 정현의 경라소선을 유심히 바라봤다.
정현은 고작 오성밖에 깨닫지 못해서 멸절사태의 눈에 차지 않았지만, 고춘기는 한 번 반격해볼 엄두도 내보지 못하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정민군의 무공을 폐지했다기에, 어떤 기묘한 재주가 있는 줄 알았더니…….'
고춘기는 자신을 향하는 검이 두려워서 십여 걸음이나 물러나는 추태를 보이고서야 이런 식으로 물러나서는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이 굳이 상대와 칼을 마주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적이 강하면 피한다.
대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고 뜻하지 않았던 곳을 공격한다.'
티무르부카가 손자병법을 권유한 이후 때때로 시간을 쪼개어 읽어본 구절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상대는 검술에 능하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는 다시 한걸음 물러나며 현철중검으로 하늘을 찔렀다.
중검을 잡은 손으로 꽃을 형상화하고 왼손을 튕겼다.
정현사태는 연신 뒤로 물러나기만하는 고춘기를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런 수준이라면 정민군이 제압당했을 리가 없다.
정민군은 그 나이 대의 제자들 중에서 도망자 기효부를 제외하고는 제일 뛰어난 검술을 자랑했다.
계속 뒤로 물러나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히 한 수를 숨겨두고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전술의 일종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귀가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하늘을 찌르고 파지법까지 바꾸는 고춘기를 보고 어떤 기묘한 검술을 펼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현사태 뿐만 아니라 장내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하늘로 찔러 올린 고춘기의 현철중검에 닿았다.
다만 장무기만은 예외였다.
과거 모란주루에서 전백광을 대신해서 티무르부카를 상대할 때, 본 적이 있는 재주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전백광은 현명패천장의 역행으로 주위를 둘러볼 수 없는 혼몽한 지경이었고 티무르부카와 장삼봉은 이 자리에 없으니 자신만 알아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검을 쥔 손만 쳐다보는 것을 보고 왠지 우쭐해졌다.
그 순간 정현사태는 손끝과 발끝부터 점차 나무토막처럼 굳어가는 것 느껴야했다.
그녀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안면근육도 상당히 굳어서 말이 되어 나오질 못했다.
고춘기가 펼친 것은 티무르부카에게 배운 목미륵반가상(木彌勒半跏像)이라는 점혈공부에 속한 것이다.
이 수법에 당하면 손끝 발끝부터 시작된 마비증세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데 피해자는 마치 온몸이 나무토막으로 변하는 것 같은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것은 특별한 방법의 해혈수법이 아니면 절대 풀 수 없는 점혈공부로써 당하는 사람은 온몸이 완전히 마비되기까지 전혀 힘을 못 쓰고 주저앉다가 완전히 굳어버린다.
그 모습이 마치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 미륵반가상을 닮았다고 해서 목미륵반가상(木彌勒半跏像)이라는 기묘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고춘기는 아무도 자신이 점화지(點花指)의 재간으로 목미륵반가상(木彌勒半跏像)을 펼친 줄 깨닫지 못하자 적잖이 안심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현철중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정현사태의 칼을 빼앗았다.
좌중은 자신의 검을 빼앗는데도 반항하지 못하는 정현사태를 보고 어리둥절했으나 곧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은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점혈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현사태께선 제 오른팔을 원하셨지만, 저는 사태의 오른팔을 원하지 않습니다."
고춘기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직도 오른손을 내뻗고 있는 정현사태의 팔꿈치 뒤에 위치한 소혜혈 위에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이 상황을 간단히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멸절사태가 나섰을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력을 보유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내공은 세월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마흔 줄에 든 정현사태의 공력은 이제 스물 남짓한 정민군의 그것보다 훨씬 깊었다.
멸절사태는 고춘기가 하늘을 찌른 검으로 시선을 빼앗고 정현사태를 점혈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고춘기는 자신이 정현사태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손엔 검을 쥐고 있으니, 이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다보면 뾰족한 수가 아니라 어떤 수라도 생각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뿐이었다.
"정허!"
멸절사태의 부름에 중년의 비구니가 앞으로 나섰다.
"민군과 정현의 복수를 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무공을 폐지하고 한 팔과 혀를 뽑아 평생 동안 음탕한 말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고춘기의 생각은 빗나갔다.
그들은 마치 자신에게 잡힌 정현사태가 죽은 사람인양 복수를 하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요망한 것아 이리 나서서 내 불진도 한 번 받아보아라."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현사태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마저 살피고 정허사태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고춘기는 아직 정현사태의 공력을 다 빼앗지 못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었다.
마치 정현사태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던 정허사태도 막상 동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듣자 고춘기를 재촉하지 않았다.
멸절사태의 추상같은 명령이 있은 지라 감히 물러나지는 못하지만, 거의 평생을 함께한 정현사태의 안전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가 목숨이라도 잃게 된다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쨍그랑!
어느새 정현사태의 공력을 모두 흡수한 고춘기는 굳이 정현사태에게서 빼앗은 검을 들고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는 자신의 현철중검이 날카롭지 않으니 정허사태의 부드러운 불진을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춘기는 잇따라 정민군의 공력과 그녀의 두 배의 달하는 공력을 자랑했던 정현사태의 공력을 흡수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꽃을 만드는 점화지(點花指)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점화지(點花指)! 그것은 소림의 점화지(點花指)법이 아니냐?"
멸절사태는 고춘기의 자세를 보고 사부에게 들었던 점화지(點花指)를 떠올렸다.
현존하는 소림의 고수 중에는 점화지(點花指)를 터득한 승려가 없었다.
그래서 아미파에서도 옛 선대에서 봤던 점화지(點花指)의 기억이 입에서 입으로 내려와 멸절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과거 곽양조사께서 천하에 일양지(一陽指)와 비견되는 몇 안 되는 지법으로 점화지(點花指)를 손꼽았다고 한다.
그녀가 고춘기에게 물어본 것은 사실 정허사태에게 경시하지 말라는 것을 조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정허사태는 고춘기의 자세에서 불가 무학의 느낌을 받기는 했으나 어떤 것이라고 딱히 떠올리진 못했다.
멸절사태가 사부에게 점화지(點花指)에 대해서 전해들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정허사태는 멸절사태의 외침에 점화지(點花指)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고춘기의 왼손을 예의 주시했다.
무림에서 상대와 싸우기 이전에 상대의 수법을 아는 것은 마치 싸우기에 앞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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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am... Nice Post

하하 ~~~ 재밌네요.
이런 것도 올리시군요. 좋으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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