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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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27)

"아미파라는 문파는 여자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제법 비겁하군.
역시 계집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린 아이를 차례로 상대하면서 훈수까지 두다니……."
전백광은 멸절사태가 점화지(點花指)를 외치고 정허사태가 뭔가 알아차린 듯 고춘기의 왼손에 주목하자 대번에 상황을 간파하고 그녀들의 속을 긁는 말을 뱉었다.
강호의 대결 경험이 전혀 없는 고춘기는 전백광이 그녀들을 욕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어찌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의 무예가 이미 상대에게 노출되었다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본래 정허사태는 아미파의 제 사대 수제자로써 무림에서도 이름이 제법 높았다.
그런데, 전백광에게 이와 같은 비난을 듣자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펼칠 초식은 금정불광(金頂佛光)이다."
그녀는 미리 자신이 펼칠 초식을 밝혀 자신이 이점을 포기했음을 보였다.
고춘기는 그녀의 말에도 한 번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금정불광(金頂佛光)이든 은정불광(銀頂佛光)이든 초식의 이름을 아무리 나불대봐야 그런 무공을 한 번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강호초출 고춘기가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정허사태는 고춘기의 미소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한 번 휘청거리더니 순식간에 고춘기의 지척에 이르렀다.
본래 아미파 내에서도 날렵한 신법으로 이릎 높은 정허사태였다.
그녀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초식 또한 금정불광(金頂佛光)이었다.
그런 그녀가 금정불광(金頂佛光)을 펼쳐내자 멸절사태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그녀가 내뻗은 불진은 꼿꼿하게 앞으로 서서 고춘기의 가슴 한 복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허사태는 고춘기의 왼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점화지(點花指)는 소림 칠십이종절예에 들어갈 뿐만아니라 일양지(一陽指)와 비견된다고 사부가 되도록이면 피하길 당부했던 무학이니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고춘기는 그녀가 자신의 왼손에만 주의를 집중하자 그녀가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에야 오른손을 튕겼다.
사실, 고춘기가 티무르부카에게 전해 받은 점화지(點花指)는 소림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이백오십 년간 불가의 색체를 지워버려서 오른 손을 들어 꽃의 형상을 하지 않고 두 손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부카도 그리고 그에게서 점화지(點花指)를 배운 고춘기도 항상 오른손을 들어 상대에게 소림의 점화지(點花指)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티무르부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얻은 점화지(點花指) 비급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손자병법을 좋아하는 티무르부카는 무예를 펼침에 있어서도 항상 그 가르침에 따르고자했다.
'이익을 미끼삼아 적을 유인한다.'
항상 오른손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임이고 왼손밖에 쓰지 못한다는 것을 거짓으로 알려 적을 유인한다.
이 한 수를 위해서 항상 소림의 점화지(點花指)를 흉내 낸 것이다.
"전쟁은 속임수다."
정허사태는 사지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고춘기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춘기는 이제 멸절사태를 상대해야할 것 같다고 느꼈다.
"혹시 멸절사태께서 들고 계신 그 검이 곽양 여협께서 남기신 의천검입니까?"

고춘기는 이미 멸절사태의 등에 짊어진 길쭉한 봇짐을 보고 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의천검인 것을 거의 확신에 가깝게 예측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말을 꺼낸 것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어볼 심산이었다.
비록 정허사태의 공력을 흡수하고 있었지만, 오른손엔 어느새 현철중검을 빼들었고 멸절사태를 주시하는 눈에는 한 치의 방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멸절사태는 그가 연달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법으로 아미파의 대제자와 수제자를 나란히 제압했는데도, 전혀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적잖이 놀라웠다.
멸절사태는 비록 오만하고 독선적인 면은 없지 않았으나, 무공에 대한 식견은 일파의 장문인답게 남달랐다.
천하에 수백 수천 종의 무학이 존재하지만, 어느 것 하나 뿌리 없는 절기는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저처럼 대단히 은밀하고 신속한 지법이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치솟았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언젠가 이름을 떨쳤을 것이 분명한데, 그녀는 그런 지법에 대해서는 전혀 금시초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티무르부카의 대단한 무예에도 불구하고 장삼봉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티무르부카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소요파의 추격을 염려해서 평생 동안 자신의 진신절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두 제자는 사부가 황궁에 등청하더라도 감히 장원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티무르부카가 내준 과제는 너무 난해해서 하루 이틀을 날을 새더라도 달성하기가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은 적지 않았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노력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들만을 과제로 내놓은 티무르부카였다.
그들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그가 제자들에게 바라는 수준이 너무 높았다.
그런 이유로 두 사형제는 벌써 십오 년이나 같은 장원에 살고 때때로 심부름도 함께 다녔지만, 그들이 나눈 대화의 대부분은 심도 깊은 무예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티무르부카의 무예는 협소하지 않았다.
현 황제 이전의 원 황실은 반세기동안 무려 열 번이나 황좌의 주인이 바뀌었다.
대제국의 권력자들이 황좌를 노릴 땐, 그들의 곁엔 항상 대단한 무학종사들이 따랐다.
그들은 당장 강호에 나선다면 이름을 날릴만한 이들이었으나, 실익 없는 강호의 명성보다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공적을 세우는 일에 열을 냈다.
돈이 많이 모이는 곳에 사람도 많이 모이는 법이다.
티무르부카는 그런 황실에서 장삼봉만큼이나 대단한 자들을 무수히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죽어나갔다.
그들이 세상에 어떤 이름을 남겼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의 피 튀기는 싸움 속에서 티무르부카의 안목과 무학의 깊이는 깊어졌다.

"그렇다.
사부님께서 지니신 것이 바로 천하제일 도룡보도와 쌍벽을 이루는 의천검이다.
감히 맞설 용기가 있느냐?"
눈앞에 벼락이 내리쳐도 태연자약한 멸절사태와는 다르게 그녀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아미파의 장여제자인 소몽청은 동요하는 동문들과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떨치기 위해 고춘기의 질문을 맞받아쳤다.
고춘기의 절륜한 지법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던 멸절사태는 그제야 제자들 사이에서 들리는 조곤조곤한 소곤거림을 듣고 그 가운데서 두려움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제자들의 소요를 잠재우려했다.
등에 짊어진 봇짐에서 적어도 일 미터 이십 센티 가량의 고검을 꺼냈다.
순간 고춘기는 멸절사태가 꺼낸 검집에서 한줄기 푸르스름한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을 느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명검이라서 그런지 검집마저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멸절사태와 자신을 서로 견주어보았다.
이미 드러난 점화지(點花指)의 재주로 그녀를 놀랠 수는 없었다.
그의 검술이라야 누군가 천하를 종횡했던 기억만 남아있을 뿐 실제로 수련한 일은 손에 꼽았다.
고작 그런 재주로는 천하에서 아미파의 고명한 검술로 이름 높은 멸절사태와 칼을 맞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점화지(點花指)와 현철검법을 제외한다면 남는 건 겨우 북명신공인데, 의천검을 든 그녀에게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가능성은 존재했다.
매우 미미하지만, 팔다리가 토막 나서 하늘을 날면 그녀의 옷깃정도는 스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어느새 정허사태의 공력을 모두 흡수해버렸지만, 그녀의 손목을 놓고 앞으로 나설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의 북명진기(北冥眞氣)는 정민군과 정현사태의 공력을 모조리 흡수한 상태라 매우 흡입력이 강력해져서 정허사태의 공력은 고춘기가 묻고 소몽청이 답하는 시간 만에 다 빨아들일 수 있었다.
고춘기가 쉽사리 앞서지 못하자 전백광은 그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저런 상태로 억지로 맞붙었다가는 이길 상대도 이길 수 없을 것이 자명하다.
싸움에 앞서서 기세에서 꺾인다면 이미 그 싸움은 해보나마나였다.
실제의 싸움에서 승패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갈리기 때문에 상대의 능력이 예상보다 형편없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상대의 칼에 목이 날아가는 일은 전백광의 인생에서 적지 않게 벌어졌다.
다행인 점은 그는 항상 상대의 목을 베는 역할이었다.
뛰어난 신법과 내력으로 쌓아올린 명성 덕분에 그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광풍도법은 손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나쁜 평가를 받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적지 않은 고수들이 그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더 많은 적의 목을 벨 수 있는 무예가 강한 것이다.
"이 늙은 비구니야!
염치가 있다면 네 나이를 생각해라!
아무리 밤이 외로운 비구니로서니 어찌 저런 소년을 잡아가 애타는 마음을 달래려하다니!
필시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본 적도 없겠군?
암~ 여기 진짜 상남자 전백광 나리께서 네 년의 외로운 마음을 어루만져주마!"
전백광은 어느새 가져온 칼을 뽑아들었다.
"형님! 절대 칼을 마주치면 안 됩니다!
의천검은 쇠를 두부처럼 가르는 천하의 명검이에요.
칼과 함께 목도 잘려나갈 겁니다."
그때까지도 용기가 나질 않아 정허사태의 손목을 놓지 못하던 고춘기는 전백광이 나섰다가 순식간에 목이 잘려나갈까 봐 소리쳤다.
전백광은 쇠를 두부처럼 가르는 명검이라는 말에 오싹한 마음이 일었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으려했다.
"그래봐야 비구니 아니겠는가?
벌써 자네가 셋이나 차지했으니, 내가 의형으로써 체면을 세우려면 한 명쯤은 품어야 공평하지 않겠나?"
그는 마치 이미 멸절사태를 제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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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올라온 글이 저번 것보다 호흡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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