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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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11)

티무르부카는 고춘기의 현철중검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면서 그가 하는 양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고춘기는 이십사자권법(二十四字拳法)의 지(之)자의 마지막 점을 찍는 듯 하더니, 돌연 일변하여 티무르부카의 눈앞에서 검 끝을 떨어 검화(劍花)를 떨쳐 시야를 가린 뒤, 복부를 찔렀다.
그것 또한 방금 전에 장삼봉이 펼쳤던 백조조봉(白鳥朝鳳)이라는 초식이었다.
티무르부카는 멀뚱히 고춘기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현철중검이 배꼽 앞 한 뼘에 이르자 왼손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손쉽게 칼끝을 잡아버렸다.
사실 고춘기의 내력은 점화지(點花指)를 대여섯 번 발출하면 고갈될 만큼 대단치 못한 양이었다.
멀쩡한 상태로도 현철중검을 전력으로 열 번을 휘두르기 어려운데, 신문십삼검(神門十三劍)을 시작으로 점화지(點花指)를 세 번이나 튕기고 이십사자권법(二十四字拳法) 중 지(之)자를 쓴 이후 무리해서 상대의 눈앞에 그 무거운 현철중검의 칼끝을 떨어 검화(劍花)까지 피웠으니 이제 칼을 들고 있는 것도 버거웠다.
힘이 다 빠져버린 상태로 상대의 복부를 노리고 현철중검이 그의 복부에 다다르기도 전에, 칼끝이 떨리지 않을 리 없었다.
티무르부카가 현철중검을 잡은 것은 고춘기를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춘기는 티무르부카에게 칼끝을 잡힌 후에 현철중검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손잡이는 자신이 잡고 있었지만, 상대가 두 손가락으로 현철중검을 들고 있는 것이다.
"아이야. 너는 소무상공(小無相功)을 익힌 적이 있느냐?"
"소무상공(小無相功)이요?"
고춘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익힌 북명신공과 함께 소요파 삼대 신공으로 불리는 사기무공이 아닌가?
티무르부카는 고춘기가 놀라는 것을 보고 그가 소무상공(小無相功)을 배웠거나 적어도 이름을 들어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는 소무상공(小無相功)을 아는구나?"
"이름만 들어봤어요. 의형이 받지 못한 이장(二掌)을 내가 대신 받았으니, 약속하신대로 앞으로 의형의 잘못을 들먹이지 마세요."
고춘기는 의천도룡기 소설 속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티무르부카가 나타나서 소설 내의 최고 고수인 장삼봉을 일패도지(一敗塗地)시키자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중상을 입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전백광이 저 환관의 가공할 장력을 받게 둔다면 절대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무상공(小無相功)에 대해 묻는 환관의 표정은 온화했으나 눈 속에 섬뜩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본 고춘기는 애써 모른 체하고 전백광의 일을 들먹여 주변을 환기시켰다.
"네가 언제 나의 이장을 대신 받았다는 것이냐?"
"방금 제가 점화지(點花指)를 펼쳐 태감(太監)께서 뻗은 왼팔의 세 혈도를 노렸는데, 제가 점화지(點花指)를 펼치기 이전에 태감께서 펼치신 것이 대력금강장력(大力金剛掌力)이 아닙니까?"
"그렇다."
"그럼 제가 점화지(點花指)로서 태감(太監)의 대력금강장력(大力金剛掌力)을 받아낸 것이군요."
티무르부카는 본래 영리하고 재능 있는 인재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는 평소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자신의 재주를 뽐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환관들의 생존방식 중 하나였다.
환관이 자신이 모시는 상전보다 나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예는 낭중지추처럼 특출난 것이었다.
십오 년 전 기황후는 고려인으로 구성한 사병조직을 기획한다.
열 살 미만의 재기(才氣)있는 아이들을 모아 어려서부터 교육시켜 몽골기병을 능가하는 정예병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기황후가 가려 뽑은 인재들이 무려 만 명에 달했다.
비록 환관에 불과하나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을 들은 기황후는 티무르부카에게 오백의 소년을 맡긴다.
평소 뛰어난 인재를 찾았던 티무르부카도 이런 명령을 매우 반겼다.
그러나 오백 명의 소년영재들 중 티무르부카의 관문제자(關門弟子)가 되어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은 오직 계사일(桂思逸) 한 명 뿐이었다.
그만큼 티무르부카가 인재를 가려보는 눈이 까다로웠다.
그런 티무르부카가 보기에도 고춘기는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한 천재였다.
단 한 번 보고 그 정수를 꿰뚫어보고 따라서 펼친 것도 모자라서 실전응용도 매우 적절했다.
티무르부카도 소무상공(小無相功)을 익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렇구나. 그 다음에 네가 펼친 검초를 피하느라 다시 한 번 장력을 거두었으니 네가 이장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구나."
티무르부카는 이 천재소년을 보자 기특한 마음이 들어서 고춘기의 장단에 맞장구 쳐줬다.
"태감(太監)! 전 소협에게 손을 과하게 쓰셨소."
"그가 마음을 곱게 썼다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고춘기는 그제야 전백광의 기식이 엄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진인!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무래도 우리 무기처럼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에 당한 모양이네."
장삼봉은 그러면서 티무르부카를 흘끔 쳐다봤다.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 그럼 장무기가 당한 현명신장(玄冥神掌)이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이란 말입니까?"
그제야 고춘기는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이 게임 속에서 현명신장(玄冥神掌)으로 잘못 입력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의천도룡기를 읽은 바 있어서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을 자기보다 내력이 높은 자와 장력대결을 벌이면 오히려 자신을 헤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익히지 않은 고춘기가, 에디터로 익힌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을 스스로 창안한 줄 아는 전백광보다 그 위험성을 더 잘 알았던 것이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고춘기는 자신의 잘못을 통감했다.
왜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이 현명신장(玄冥神掌)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것만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내력이 자신보다 강력한 자에게 사용을 금하라고 미리 언질을 해줬더라면 전백광처럼 약삭빠른 인물이 감히 티무르부카 같은 고수에게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땅을 치며 후회하는 고춘기에게 자신이 입은 연위갑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게임 속 방어구인 연위갑을 이렇게 갖고 있으니 혹시 아이템목록에 들어있던 물건도 가지고 있을지 몰라.
그 중엔 영약이나 해독약이 존재할지도 몰라!
그는 얼른 등짐을 풀어 소지품을 확인했다.

등짐 안엔 아홉 권의 책이 가장 큰 부피를 차지했다.
맨 위에 오른 책 표지에 쓰인 광풍도법(狂風刀法)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전백광의 집을 뒤지다 주워온 모양이다.
전백광을 치료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물건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외에 침통 두개, 자기로 된 약병 하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아홉 첩의 약봉지, 염주알 다섯 개가 소지품의 전부였다.
먼저 약병을 열어 냄새를 맡아봤다.
고춘기는 갑자기 지극히 강렬한 시고 매운 냄새가 코 속으로 급격하게 들어오는 바람에 몇 번 재채기를 해야 했다.
"이것은… 구전웅사환(九轉熊蛇丸)이로구나."
구전웅사환은 천산 표묘봉 영취궁의 영약으로 전문적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약이며 기상회생의 효험이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춘기는 냄새만 맡고도 그것이 어떤 약인지 알아맞혔다.
"영약이지만, 전 형은 한독(寒毒)에 당한 것이니… 쓸모가 없구나."
고춘기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약봉지를 열어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봤다.
"퉤, 옥령산(玉靈散)이군. 이것 또한 외상에 적합한 약이다."
장삼봉과 티무르부카는 고춘기가 하는 양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이 지고 다니는 등짐을 풀어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감별하듯 행동하니, 보는 사람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 공자, 이미 늦었네. 우리 무기도 같은 병을 앓고 있어서 고생하고 있네. 전 소협의 안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했으니……. 설사 돌아가신 선사께서 살아 돌아오셔서 구양진경(九陽眞經)을 전수한다고 해도 채 익히기도 전에……."
고춘기는 자신의 판단미숙으로 전백광이 아니, 다른 사람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인, 진인. 만약, 능가경(稜伽經)에 쓰인 완전한 구양진경(九陽眞經)을 익히면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능가경(稜伽經)에 구양진경(九陽眞經)이 남겨진 것은 몇몇 사람 밖에 아는 이가 없는데……."
"살 수 있습니까?"
"어렵네. 그나마 전 소협이 나이에 비해 고강한 내력을 지녀 잘하면 다섯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네."
"다섯 시간 안에 익히면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곤륜산은 얼마나 멉니까?"
고춘기는 중국의 지리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곤륜산은 전설의 선산이네……. 곤륜산맥이라면 수만리 길이니, 전설의 대붕을 타고 간다면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걸세."
"수만리, 천 리가 사백 킬로미터고 만 리면 사천 킬로미터……."
지독하게 넓은 땅덩어리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태감. 태감께서는 살릴 방도가 있으시겠지요? 태감의 공력이 천하제일이시니, 전 형을 살릴 수 있지요?"
티무르부카는 그제야 전백광의 맥문을 잡고 병세를 확인했다.
'지독한 한기(寒氣)가 역행하더니 이미 뼈와 골수에까지 침투했구나. 한독(寒毒)이 경략백맥(經略百脈) 속에 응결된 수준이라면 소무상공(小無相功)의 공력(功力)으로 어찌해본다지만…….'
"아이야, 장 진인의 말씀대로 만약 저자의 안색이 푸르스름한 수준에서 내게 부탁했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고칠 수 있다. 허나, 이미 거무스름하게 변했으니 구제할 길이 없다. 아마 진인께서 말씀하시는 구양진경(九陽眞經)이라는 것을 얻더라도 소용없을게다."
티무르부카는 고춘기가 안절부절 못하자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내, 내 잘못이야. 내가 미리 알려줬어야 했어. 아니, 나는 왜 에디터를 쓰면서 하고 많은 무공 중에 현명신장을 골랐을까?"
장삼봉과 티무르부카는 어린 소년이 자책하다 끝으로 횡설수설하며 알아듣지 못할 말까지 뱉어내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러다 혹시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티무르부카는 그 걱정이 남달랐다.
세상에는 가끔 보통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천재들이 출현한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행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지만 영특함이 지나치면 미쳐버리기도 한다.
티무르부카는 이 어린 소년이 그와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 네 잘못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만 걱정을 떨쳐 버리어라."
건장한 체구인 전백광에 비해 반 뼘밖에 작지 않은 고춘기였지만, 과거로 회귀하는 이상한 상황 속에서 십 년이나 어려지는 바람에 열 한두 살의 외모를 지녔다.
몇 해 전 환갑을 넘긴 티무르부카에겐 그저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티무르부카는 세게 안으면 부러져버리는 아기 새처럼 살포시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안심시키려했다.
고춘기는 여전히 연위갑을 입고 있었는데도 티무르부카는 크게 개의치 않고 고춘기를 끌어안고 연위갑의 가시 위를 토닥토닥 두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연위갑의 가시는 그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소무상공(小無相功)을 연성(鍊成)한 덕분이다.
장삼봉은 다시 한 번 그의 공력에 놀랐다.
그리고 티무르부카가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의 한독(寒毒)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저 환관이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을 익힌 것이 확실하구나. 그럼 아직 무기의 병세가 전 소협과 같이 진전되지 않았으니 고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인가?'
장삼봉은 티무르부카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자신의 입장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현실적으로 그에게 부탁해 장무기의 병세를 치료해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장무기를 납치하고 어린 아이에게 극악한 살수를 쓴 흉수와 일문(一門)에 속해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순간 고춘기는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태감! 그러면 전 형의 안색이 다시 푸르스름하게 변한다면, 그러면 살릴 수 있습니까?"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히 손을 써볼 수 있다. 허나, 이미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고춘기는 티무르부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팔을 뿌리치고 전백광의 앞으로 갔다.
그는 두 손으로 전백광의 앞섶을 잡은 뒤 양쪽으로 당겨 상의를 찢어버렸다.
악화일로를 걷는 전백광의 상태가 걱정돼서 옷을 걷어 올릴 여유도 없었다.
오른 손 엄지로 전백광의 아랫배에 위치한 기해혈(氣海穴)을 누르고 왼손의 엄지로 전백광의 양쪽 유두 사이 중앙에 위치한 전중혈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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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속도감이 적절해서 재밌었습니다.

감사합니닷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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