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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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외전

9화 궤도(詭道) (15)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전하기 전에 네게 일러둘 것이 있다."
"예, 경청하겠습니다."
"본디, 이 소무상공(少無相功)은 소요파라는 곳의 절기다."
"스승님, 그러면 소림 칠십이종절예와 소무상공(少無相功) 모두 구마지 선사께서 훔쳐 배우신 겁니까?"
"이노옴! 예로부터 책 도둑질은 도둑질이 아니라 고했다. 배움을 구하는 일을 두고 어찌 도둑질이라고 매도하느냐!"
내가 보기엔 분명히 도둑질이지만, 서로 손바닥을 마주쳐봐야 박수소리밖에 더 나겠는가.
"제가 경솔했습니다."
"크흠! 네 말도 완전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구마지 선사께서 소무상공(少無相功)을 훔쳐 배운 일로 인해서 무서운 살육이 자행되었다.
소요파는 천하에 이름을 아는 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대단한 고수들이 즐비하다.
육십이 년 전, 소요파에서 보낸 두 고수가 백서른한 명의 승려를 살해했다.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그들은 모두 과거 대설산 대륜사 구마지 선사의 가르침을 이은 승려들이었다.
그들 모두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익혔으나 소요파에서 보낸 두 명의 고수를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이백 년에 가깝게 아무 말 없던 소요파에서 이제야 제자들을 급파해 문호를 정리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알아본 결과 소요파는 오랫동안 내부갈등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바람에 바깥일에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집안을 정리하고 외적을 물리친 격이지."
"우리가 외적인가요?"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들은 모두 죽여 없앴다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이제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익힌 이들은 자신들, 소요파의 제자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과거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까지 따라오셨다가 한 큰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은인자중하시던 구마지 선사의 마지막 후예이시다.
원나라는 승려에게 매우 후대해왔다.
큰스님께선 이름 높은 고승이셨고 원 황실에서도 영향력을 끼치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그분의 가르침과 함께 유산으로 엄청난 부를 얻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물려받은 부는 좋아라 하셨으나 고절한 무예는 달갑지 않아하셨다.
본래 무예를 천하게 여기시는 분이기도 했고 큰스님께서 고절한 무예를 지니시고도 자신을 숨기고 사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문의 절학을 비급으로 전해 받고 없애버리지는 않으셨지만, 익히지도 않으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사문의 비급을 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자질은 나쁘지 않았고 곧 부끄럽지 않을 성취를 거두었다.
그 때,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날로 나는 거세당한 뒤 원나라 조정에 바쳐졌다."
"그럴 수가…….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강제로 거세시킬 수 있습니까?"
"아가. 넌 정말 영특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구나.
고려의 형세가 그렇다.
아비가 아들을, 형이 아우를 거세시켜 원 황실에 바치려한다.
모두 권력을 위해서란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권력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 무서운 것이지요."
"그래, 그렇구나. 너는 정말 영특하구나."
티무르부카는 웃고 있었지만, 고춘기는 왠지 가슴이 저릿했다.
"아무튼, 소무상공(少無相功)엔 그런 사연이 깃들어있다.
너는 지금 천하에 손꼽히는 신공을 익히는 것은 틀림없지만, 항상 주의해야한다.
네가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익히는 것은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알겠느냐?"
"예,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입을 다문다고 감출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익히면 다른 사람의 무학을 손쉽게 훔치고 따라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무학을 익히는 일도 매우 쉬워진다.
소무상공(少無相功)이 몸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앞에서 거론한 재주들은 눈에 띄는 것들이다.
네가 내가 펼친 점화지를 보고 그대로 흉내 냈을 때, 내가 소무상공(少無相功)을 언급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앞으로 네 영특함을 숨겨라.
할 수 있겠느냐?"
"저는 원래 그리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앞으로 네 주변을 잘 살피어라.
남들이 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말거라.
가끔 놀랍도록 똑똑한 이들은 자신들이 똑똑한 줄 모른다더구나."
"저는 정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춘기는 이제 두려웠다.
티무르부카는 정말로 자신을 천재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배우겠다고 매번 스승을 놀라게 하는 성취를 선보이겠다고 선언했다.
티무르부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지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을 그 잣대에 맞춰서 가르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자신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래, 알았다.
이제 알아들었다.
그럼 먼저 한 번 읽어보아라.
하나하나 천천히 가르쳐줄테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거나."
고춘기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티무르부카가 내민 책은 전공서적처럼 두꺼웠고 한장 한장마다 세필로 쓴 글씨가 가득했다.
한문으로 쓰였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꽤나 많은 한자를 알고 있었다.
간간이 모르는 글자가 나올 때마다 티무르부카에게 물었고 한 번 물어본 글자는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한자로 써져서 매우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늘 안에는 다 못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한장 한장을 만화책 읽는 속도로 넘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글자 씩 읽었는데, 이내 서너 글자 씩 읽혔다.
그것은 그냥 읽어졌다.
그냥 한눈에 들어왔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몇 장 더 넘기자 한 줄씩 읽혔다.
거기서 열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여섯 줄씩 읽기 시작했고 책의 반절을 읽었을 즈음부터는 한 번에 좌우로 펼쳐진 두 쪽을 읽었다.
그것은 그냥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은 것처럼 완벽하게 머릿속에 새겨졌고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면서 음미한 것처럼 의미가 확연하게 와 닿았다.
중간 중간 모르는 글자가 나올 때와 이상한 묘사와 서술이 나올 때 티무르부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빼고는 어렵지 않았다.
전공서적 수준의 책을 사진첩 넘기듯이 훑어봤는데, 머리 가득 그 내용이 새겨졌다.
'정말 내가 똑똑해졌나?'
티무르부카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으나 물어볼 것이 없었다.
그때부터 티무르부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묻기 시작했다.
처음엔 티무르부카가 묻고 내가 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생각과 티무르부카의 생각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우리는 그렇게 날이 새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닭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티무르부카는 나를 놓아줬다.
이런 모습이 똑똑한 모습이라며 남들에겐 책을 한 번에 외워버리거나 거기에 대한 내 생각을 표현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동틀 녘에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장무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침 먹으라며 깨워댔다.
얼마 자지 않은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온몸이 개운했다.
박동하는 심장처럼 북명신공(北冥神功)이 시리도록 차가운 북명진기(北冥眞氣)를 끊임없이 유통시키고 있었다.
'북명진기(北冥眞氣)는 목숨과도 같다더니, 과연 그렇군.'
과거 무애자는 허죽에게 북명진기(北冥眞氣)를 물려주자 목숨을 잃었다.
또한 천산동모는 무애자가 구십 세가 넘은 노인이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도 그가 만약 무공을 흩뜨리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명진기(北冥眞氣)가 이렇게 시리도록 차가운 이유는 어제 전백광의 한독을 흡취했기 때문이다.
전백광의 한독과 티무르부카의 소무상공(少無相功) 그리고 내 북명진기(北冥眞氣)가 만나 하나가 되었다.
아침은 스승님과 전백광, 장무기 넷이 함께 먹었다.
"네 위로 두 명의 사형이 더 있다. 지금은 내 심부름을 갔지만, 보통은 대도에서 함께 공부하며 지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예."
아침을 들자마자 스승님은 전백광과 장무기의 한독이 발작하지 못하게끔 혈도를 봉쇄하고 일을 보러나가셨다.
환관이 되면 편히 살면서 일도 많이 할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관직을 받아서 그런지 꼭 그렇게 편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장 동생.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했군.
내 이름은 전백광이고 나이는 서른둘이다.
이 형님이 첫사랑을 실패하지만 않았어도 자네보다 나이 많은 아들이 있었을 테니, 말을 편히 해도 되겠지?"
"에? 전 대협. 그냥 편히 말을 놓으시면 될 일이지. 나이를 속여 무엇합니까? 남자답게 행동하십시오!"
장무기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전백광을 추궁했다.
'대접받고 싶은 것은 알겠지만, 열 살이나 올려치는 것은 너무 얼토당토않지 않은가!'
장무기는 속으로 어이없는 마음이 일었으나 어려서부터 장취산과 무당파의 사백, 사숙들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아 손위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형님, 나이를 속였습니까?"
이십세기 중반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베이비페이스 열풍으로 인해서 인류는 어려보이는 것에 매우 집착했다.
특히 할리우드의 영향을 많이 받는 미국의 동맹국들에서 이런 분위기가 더 부각되었다.
이웃 섬나라와 우리나라 또한 그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 바람에 동안열풍이 대단했다.
그 영향인지 십년이나 젊어졌다는 전백광의 얼굴은 전혀 이십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러군. 무기 동생, 그럼 내가 몇 살로 보이나?"
'서른두 살이면 서른두 살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몇 살로 보이냐는 것은 또 뭔가?
의부님 말씀대로 강호에는 참 별난 사람이 다 있구나.'
"스물하나 정도 되지 않았어요? 아무렴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데 제가 공대하자고 하겠어요?"
그러면서도 무기는 일일이 대답해줬다.
그는 본래 모난 성격이 아닌데다가 어려서부터 외롭게 자랐다.
빙화도에서도 그랬고 무당에 와서도 치료받느라 자기 또래의 친구들과의 교우도 변변치 않았다.
빙화도에서는 부모님과 의부님밖에 없었다손 치더라도 무당에 와서는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의 한독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픽픽 쓰러져서 고통을 호소하는 무기를 보고 또래들이 오히려 놀라고 두려워하는 바람에 그는 언제나 어른들에게 둘러싸였지만, 어른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시달려야만했다.
어쩌다보니 자기 또래의 고춘기와 큰 형뻘인 전백광과 함께하게 된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더군다나 고춘기는 의부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비밀을 숨기느라 이 년 동안이나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아야했다.
혹시 잠꼬대로라도 비밀을 누설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나 마음 졸여야 했다.
어린 나이였으나 열두 살에게 이 년이란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제 비밀을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생겼으니,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그럼, 오늘부터 내 나이는 스물한 살이다."
"무기 동생. 그럼 나는 몇 살로 보이나?"
물어오는 고춘기를 보며 장무기는 다시 한 번 참 특이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얼굴만 봐서는 자기보다 많아야 한두 살 더 먹었을 또래인 것 같았는데, 키는 전백광과 반 뼘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장무기는 아직까지 또래 중 이렇게 큰 아이를 본 적이 없어서 몇 살이라고 단정 짓기가 어려웠다.
"어, 얼굴은 열 서넛 정도 되어 보이지만, 키가 너무 커서 잘 모르겠습니다."
열 서넛이라는 말에 어려졌다는 것보다도 키가 더 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춘기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앞으로 열네 살이다. 형님, 나는 열네 살이우."
장무기로써는 이 두 형제를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 동생. 나이차이도 많이 나지 않는데 앞으로 호형호제하지?"
방금 전까지 스무 살이나 더 먹었다며 으스대더니, 어려 보인다니 한술 더 떠서 금세 호형호제하자는 전백광이었다.
장무기는 거절하지 않았다.
"무기야 네가 한독을 앓은 지 얼마나 됐다고 했지?"
"부모님이 돌아기시기 직전에 그리됐으니, 이 년 남짓 되었습니다."
"그래, 그 증상은 어떠한가?
"시간이 갈수록 낯빛이 안 좋아졌고 그럴수록 발작 때의 고통은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래, 그 발작 주기는 어느 정도인가?"
"대중없습니다.
삼사일에 한 번 발작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발작하지 않아 다 나은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발작이 찾아와서 한 시간 간격으로 열두 번이나 괴롭히고 사라졌습니다."
장무기의 대답을 듣자 평소 심각한 것과는 거리가 먼 전백광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세 사람 중 유일하게 멀쩡한 나는 가만히 앉아서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여간 고역스러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보다 심한 병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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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좀 더 매끄러워졌네요. 이 때 쯤부터 탄력 붙었었나 봅니다.

쓰다보면 매끄러워지고 손 놓으면 다시 조잡해지네요.
관심 깊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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