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37 네 멋대로 해라

in #stimcity3 years ago


그림1.png






#37

네 멋대로 해라





마드리드를 떠나 프랑스 북부의 도시 릴에 왔다. 파리, 리옹, 마르세유에 이은 프랑스의 4대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도심에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다양한 유럽 도시로 향하는 열차들도 이 도시의 중앙역에서 출발한다. 역 이름도 그래서 릴 유럽이다. 자국 수도 파리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이 더 가깝다. 그래서 벨기에만큼이나 수제 맥주도 다양한 곳이다. 규모와 상관없이 릴의 도심은 반경 1킬로미터 안에 밀집해 있다.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유럽 특유의 옛 도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다만 프랑스 정부가 코로나 재확산 세에 대응해 10윌 중순부터 야간 통행 금지를 실시해 저녁 9시부터 이 활기에 찬 도시는 급작스러운 고요와 침묵에 빠져든다. 여행자인 나로서도 프랑스 밤 문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게 큰 아쉬움이다. 프랑스의 9시 통행 금지 정책은 사실상 거의 모든 레스토랑의 저녁 영업을 방해한다. 이들의 저녁 식사 시간은 보통 8시 이후인데 식사를 오래 하는 프랑스인들로선 어지간해서는 9시 전에 식사를 마칠 수 없을뿐더러 그렇다 해도 레스토랑 직원들은 가게를 정리하고 9시 전에 귀가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저녁 영업을 포기한 식당들이 많다.



원래는 순례길을 마치고 바르셀로나에 가서 얼마간 머물 참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바꿔 여기에 온 건 순전히 한국인 사진작가 최승희 씨 때문이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기 직전 그를 만났고 프랑스에서 당차게 자기 삶을 개척하고 있는 이 30대 중반 한국 여성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나만큼 한국 사회의 획일성을 못 견뎌 해서 인지 한나절을 함께 보내는 동안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그래서 나는 순례길이 끝나면 그녀를 만나 다큐멘터리의 일부라도 찍기 위해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차였다. 그런 제안을 했을 때 최승희 씨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전 그다지 특별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아요. 그저 프랑스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 제가 감히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특별하거나 유명한 사람만 다루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어떤 이야기를 담느냐에요. 나는 최승희 씨가 이곳에서 일구고 있는 삶 그 자체가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비탄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길도 가능하다는 걸 최승희 씨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최승희 씨는 다큐멘터리스트인 제 눈에 충분히 특별해 보여요.”



그 말대로다. 최승희 씨는 내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 캐릭터였다. 내가 그녀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색다른 야심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릴이라는 도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수시로 메시지를 보내 가볼 만한 명소를 알려주었고 심지어 지하철을 타는 방법, 숙소 주변에 모닝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까지 검색해 보내줄 정도로 배려심이 넘쳤다. 그녀 덕분에 나는 릴의 극장에서 장 뤽 고다르의 걸작 ‘네 멋대로 해라’를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 릴의 미술관에서 르누아르와 모네, 밀레의 작품을 발견하고 짜릿한 쾌감을 얻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의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최승희 씨는 말로 그치는 립서비스 호의가 아니라 배려라는 구체적인 태도와 실천으로 진심을 증명하는, 보기 드문 한국인이었다.



내가 ‘보기 드문’이라는 표현을 쓴 건 부모 자식간이 아니면 순수한 호의의 실천이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유럽에서 마치 그 원형질의 인간형을 만나게 된 것이다. 순례길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 안드레스에 이어 최승희 씨와의 인연도 재회를 통해 이어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말했듯, 그의 도전적 일상을 다큐멘터리라는 그릇에 담아 학력 자본조차 세습되는 조국의 냉랭한 현실을 견디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싶은 욕심도 컸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촬영 장비라곤 아이폰 한 대가 고작이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에 동원되는 장비 목록을 고려한다면 턱없이 열악하다. 그래서 나는 릴에 있는 동안 일종의 사전 조사 차원의 탐문을 해나가기로 했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20세기소년 추천사
#01 안갯속의 여행자
#02 분실
#03 근대 정신
#04 가짜 뉴스
#05 충동위로
#06 자유의 일상성
#07 민중의 사고방식과 언어
#08 시민 의식
#09 여행자의 눈
#10 고향
#11 용기
#12 인연
#13 메타포
#14 그리움
#15 극기
#16 짝
#17 길동무
#18 내일 일
#19 단절
#20 호의
#21 민족
#22 갑질
#23 도착통
#24 우연의 산물
#25 중국 음식점
#26 불쌍한 표정
#27 계획
#28 감시
#29 이유
#30 오르막
#31 장애
#32 동기
#33 목적지
#34 무뢰한
#35 폐
#36 탈출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6
JST 0.030
BTC 78880.92
ETH 3188.85
USDT 1.00
SBD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