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27 계획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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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계획





아스토르가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새벽에 일어나 남은 일정을 검토하고 있자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일단 나는 앞으로 열흘 안에 순례길을 끝낼 작정이었다. 이곳 날씨가 생각보다 빨리 추워지고 있고 무엇보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안드레스가 있는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가이드 책자와 어플에 따르면 남은 순례길 루트로는 12일을 더 걸어야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구간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할 텐데 어느 구간을 건너뛸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호스텔 침대 위에서 구간들을 이렇게 저렇게 살피다가 나는 가이드 책자를 던져버리고 말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딱 한국에서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늘 이렇게 저렇게 계획을 짜는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그런데 지나치게 세부적인 계획 짜기는 늘 틀어지기 일쑤였다. 막상 일이 시작되면 상황은 거의 모든 경우에 내 예측을 빗나갔다. 그러니 계획을 짜는 행동은 그저 불확실한 미래를 눈앞에 둔 자의 자기 위안을 위한 짓일뿐이다. 여기까지 와서 똑같은 행동 패턴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안드레스와 떨어져 다시 혼자가 된 상황이 주는 불안감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열흘 안에 끝내겠다는 목표가 생기면서 강박도 시나브로 커진 것도 한몫했다.



나는 안드레스가 순례길을 어떻게 계획하고 걸었는지 돌이켜 보았다. 그는 오늘 어떤 목적지까지 갈지 미리 정하고 출발하되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 상태에 따라 거리를 탄력적으로 조절했는데 이를테면 어느 날은 9킬로미터만 걸었고 어느날은 20킬로미터를 걸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딱 그날 하루치만 계획하고 걸은 것이다. 사실 시시각각 날씨와 몸 컨디션이 바뀌는 게 순례길이니 그의 방법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나도 오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내일, 일주일 뒤, 한 달 뒤, 1년 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어떤 야심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인간이 그 불확실성에 대비해 자신과 집단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쌓아온 노하우다. 그러나 대비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대비는 날이 추워지니 든든한 외투를 챙기는 것이지만 계획은 상황의 불확실성이라는 변수를 제거한 채 온전히 자기의 행동 의지를 시계열 순으로 정돈하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그 정돈 작업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도가 지나치면 불안과 강박에 빠지고 계획이 틀어지면 자책에 빠진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지금, 태어나 처음 걸어보는 낯선 길 앞에서 과연 계획이란 게 얼마나 효용이 있을까? 오늘 도착할 목적지에 머물만한 숙소가 있는지, 날씨는 어떤지 체크하기만 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 아니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침 든든히 챙겨 먹은 뒤 길 잃지 않고 잘 걷는 것이다. 길 위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면 또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다가올 불확실성을 먼저 즐길 수는 없다. 단, 지나간 불확실성 가운데는 행운도 있다.



길에 나서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사람을 만나야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가장 안전한 건 집에 틀어박히는 것인데 안전하긴 해도 이야기를 만들 수 없고 더욱이 행운도 기대할 수 없다. 예측 가능성과 확실성은 안전을 보장하되 변화에 취약하다. 불확실성은 위험하되 고비를 넘는 흥분을 안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확실성의 숲을 통과하는 과정이다. 즐기는 것까지는 힘들어도 뒤돌아보면 이야기가 남는다. 이야기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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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나서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사람을 만나야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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