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19 단절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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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단절





에스테야에서 로사르코스까지 걸어가는 길에 중년의 스페인 남자를 만났는데 어디서 왔냐고 내가 묻자 그는 산티아고라고 답하고는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산티아고 사람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집이 있는 산티아고로 걸어가는 중이라니. 나는 그에게 호기심이 생겨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안드레스는 올해 56세의 스페인 남자다. 그에겐 장성한 딸과 아들이 있는데 딸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아들은 EDM DJ 라고 했다. 그는 원래 TV 방송국의 코미디쇼 작가로 일하다 최근 전업 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써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최근에는 광고 회사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여자 친구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나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했다.



“서울에 며칠간 머물렀는데 거긴 정말 완전히 다른 세계더군요. 저와 여자 친구는 서울의 매력에 흠뻑 빠졌지요.”



그리고 그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외국인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처럼, 한국인들이 술을 마시고 취하고 노래 부르는 걸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내가 정말 의아했던 것은 이렇게 놀기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딛고 발전된 나라를 만들었느냐입니다.”



나는 그에게 답했다.



“한국은 전쟁 이후에 상당히 빠르고 집약된 근대화 과정을 거쳤어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게 국가로부터 개인까지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도 엄청 심했죠. 한국인들은 술도 전투처럼 마시는 경향이 강해요. 스트레스의 강도가 심한 만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도 크죠.”



어쩌면 나는 한국에 대해서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대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까지 와서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자부심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이 근면하고 모든 면에서 성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빤한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어쨌든 우리의 대화는 곧 순례길의 이모저모로 옮겨왔는데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그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례길이란 말이죠. 중세 교회 권력의 마케팅 전략이었어요. 그들은 산티아고에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는 거짓말을 창안해냈죠. 그리고는 유럽 각지에서 순례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여러 이해관계를 가진 봉건 영주들의 싸움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으로선 유럽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묶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어요. 그게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산티아고에 가면 도시 입구에 이런 글귀가 있어요. ‘유럽은 순례길에서 탄생했다.’”



나는 궁금해졌다.



“당신은 종교적인 이유로 순례길을 걷는 게 아니군요. 그렇다면 왜 여기에 왔죠?”



안드레스는 말했다.



“이것저것 일에 대한 생각을 좀 끊어 버리려고요. 단절 disconnect가 이번 순례길의 내 목표입니다.”



그는 스틱을 어깨 너머로 보내며 말을 이었다.



“일상 세계와의 단절, 아주 중요하죠. 우리는 모두 잠깐 멈춰서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야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이라도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어요. 일상의 속도에 몸을 맡겨두면 무엇이 문제인지 도무지 보이지가 않더군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잠시 멈춤의 시간을 억지로라도 가져야 하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게 문제에요. 오늘 아침에 나는 한국에 있는 은행 계좌로 접속해서 들어와 있어야 할 돈이 들어왔는지 확인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은행 대출 이자를 갚을 수 없거든요. 현실은 단절하고자 하는 저의 욕망을 끝내 방해하죠.”



내 얘기를 껄껄대며 듣고 있던 안드레스의 휴대폰이 올렸다. 스페인어로 한참 통화를 하던 안드레스가 통화를 끝낸 뒤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이한 신음 소리를 흘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망할 놈의 고객사가 은행에서 보험회사로 확장하면서 회사 이미지 광고 카피를 만들어 달라네요. 내가 지금 휴가 중이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는데도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일까지 카피 문구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젠장!”



그는 잔뜩 짜증 섞인 표정으로 툴툴댔다. 나는 그를 놀리고 싶었다.



“Disconnect? 쉽지 않죠?”



그와 나는 함께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후두둑 내렸으나 우리 둘 다 우의를 꺼내지 않고 한동안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가 곧 멈출 것 같은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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