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24 우연의 산물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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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우연의 산물





안드레스와 헤어졌다. 열흘 남짓한 그의 휴가 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는 산토도밍고에서 짐을 챙겨 열차 편으로 그의 일터가 있는 산티아고로 돌아갔다. 나는 20킬로미터 더 이동한 부르고스에서 호텔을 얻어 하루 휴식을 취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안드레스와 불과 닷새 정도 함께 있었는데 그가 떠나고 나니 고독감이 감돌았다. 남은 까미노 일정도 괜히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이 여정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을까? 당장 스페인의 코로나 상황이 다시 심각해져 큰 도시들이 잇따라 봉쇄에 들어갔다. 마드리드와 발렌시아에 이어 순례길의 가장 큰 도시 레온도 봉쇄되었다.



레온이 봉쇄됨에 따라 안드레스는 떠나기 전 내게 일정 조정을 제안했다.



“부르고스에서 열차로 레온 서쪽의 도시 아스토르가로 바로 가세요. 순례길 중간에 걸쳐진 200킬로미터 정도의 코스를 건너뛰는 거죠.”



내가 죄책감을 느낄까 봐 그는 건너뛰게 될 순례길 코스에 대한 안내도 덧붙였다.



“사실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는 끝없는 평원이에요. 드라마틱한 자연경관이 없죠. 아주 지루할 겁니다.”



나는 그의 가이드에 따라 순례길 일정을 축소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언제 다른 도시들까지 봉쇄될지도 모를 정도로 순례길 위의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막 지나온 나바라주도 봉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하나는 산티아고에서 안드레스와 재회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다. 순례길에 나선 첫날부터 나는 혼자였고 철저히 혼자가 될 각오였는데 어느덧 이 길은 사람을 만나는 길이 되었고 목적지도 산티아고가 아닌 산티아고의 안드레스가 되었다.



나는 그가 떠나기 전날 산토도밍고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그에게 말했다.



“우리 삶의 우연과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순례길 위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죠. 내가 만약 다리가 아파 론세스바예스에서 팜플로냐까지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일정이 달라 만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내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인연은 우연의 산물이죠.”



안드레스는 화답했다.



“그 우연들이 운명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왔기 때문이에요. 마치 신의 선물처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인연을 각별하게 여겨야 합니다.”



“맞아요. 모든 인연은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그 가운데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죠. 아마도 나중에 뒤를 돌아보아야 어떤 인연이 운명적인 신의 선물인지 알게 되겠죠. 안드레스 당신은 고작 닷새 같이 지냈는데 신의 선물과도 같은 인연처럼 느껴져요.”



“그건 우리가 인사말을 나누는 데 그친 게 아니라 길을 함께 걸었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그가 길에서 가르쳐준 스페인어로 작별을 고했다.



“아미고, 아스따 루에고.(친구, 또 봅시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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