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31 장애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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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장애





갈리시아 지방은 마치 우리나라의 강원도 두메 산골 같았다. 해발고도 1천 미터 위의 구릉에 소들이 목초지를 거닐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마을들은 한산한 시골 동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농부들은 흔히 상상하는 유러피언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소들을 무심히 몰고가는 촌부의 뒷모습은 우리 농촌의 풍경처럼 보여서 차라리 정겹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전원의 한가로움을 만끽했노라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도시인의 위선일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불편한 것 투성이다. 게다가 이곳은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 스페인 시골이니 하다못해 식당에 가서 주문하는 것조차 벅차다. 이 사람들이 영어를 할 거라고 기대하는 건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이 스페인어를 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과 진배 없는 일이다.



하롯밤 머물 숙소를 구글맵으로 검색해 찾아가면 문을 닫은 경우가 허다했다. 몇번 그렇게 허탕을 치니 나는 슬슬 불안해졌다. 어느새 스마트폰 앱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습성에 젖어버려 인터넷 상의 정보와 현실이 다르면 순간적인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게다가 시골이라 유럽의 유심칩도 소용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와이파이 신호를 잡기도 어려워 오프라인 상태로 있으면 불현듯 막막해지는 것이다.



이럴 때는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손짓 발짓 해가면서 현지인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다가가 말을 거는 것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비야프랑카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숙소를 찾지 못해 마을을 배회하고 있었다. 마을 초입에 붙어있던 광고판을 믿은 게 탈이었다. 막상 찾아가니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까미노 앱에서 소개한 다른 숙소들도 마찬가지였다. 막막해졌다. 여행길에 잠자고 쉴 공간이 없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렇다고 길 바닥에서 자기엔 해가 진 뒤의 날씨가 너무 추웠다.



마을 골목 어귀의 바에 무작정 들어가 묻기로 했다. 나는 바의 지배인에게 알베르게라는 말만 몇 번 되뇌었다.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 나를 다시 골목으로 이끌더니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 에스떼야, 엘 에스떼야"



나는 노파심에 물었다.



"오픈?"



다행히 그는 그 말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씨 씨"



그를 믿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500미터 정도 걷자 과연 엘 에스떼야 라고 쓴 알베르게 간판이 나타났다. 구글맵에도 나오지 않고 까미노 안내 어플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은 알베르게였다. 문을 열고 빼꼼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다. 나는 다시 아득해졌으나 계속 헤딩을 시도할 수밖에.



"올라, 올라!"



스페인어 인사를 우렁차게 두 번 외쳤더니 2층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미소를 품으며 내려와 현관으로 다가왔다.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면서 두 손을 머리 옆으로 모으는 걸로 보아 잘 곳을 찾냐고 묻는 게 분명했다. 나는 외쳤다.



"씨 씨. 베드!"



하여 나는 그날의 안식처를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초입의 광고판도, 구글맵도, 까미노 어플도 날 돕지 못했다. 그날, 날 결정적으로 도와준 이는 무작정 찾아들어간 동네 작은 바의 지배인이었다. 사실 현지인이야말로 여행자의 아득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현지인과의 소통을 두려워하고 오로지 스마트폰에만 의존하려 했던가. 이 과정에서 나는 문명의 이기에 잔뜩 길들여져 사람과 사람 간의 원초적인 소통을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장애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편리함만큼의 장애도 안겨주었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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