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22 갑질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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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갑질





고풍스러운 중세풍 마을인 비아나를 출발해 4시간쯤 걷자 꽤 큰 규모의 도시가 나타났다. 드디어 로그르뇨였다. 우리는 호텔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호텔에는 알베르게에는 없는 욕조가 있기 때문이다. 닷새 정도에 한 번은 호텔에 묵을 필요가 있었다. 잔뜩 굳은 다리 근육을 뜨거운 목욕으로 풀어주어야 다음 코스를 튼튼하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날 오후 나와 안드레스는 3성급 싱글룸에 짐을 풀고 좀 쉬었다. 저녁이 되자 그에게서 저녁 먹으러 가자는 문자가 왔다. 안드레스와 함께 호텔을 벗어나 구시가지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이채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집집마다 서로 다른 핀초들을 파는 바들이 밀집해 있는 골목이었다. 평일 저녁이었는데 사람들이 시나브로 늘어나기 시작해 어느새 골목은 핀초와 와인을 마시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핀초는 타파스라고도 불리는 스페인 특유의 간식이다. 저녁을 먹기 전 허기를 달래기 위해, 혹은 와인 안주로 먹는 간단한 음식인데 다양한 재료로 각양각색의 요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안드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버섯요리를 하는 집으로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소문난 맛집은 늘 그렇듯 그 집 역시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 인해였다. 아주 싱싱하고 두터운 양송이를 올리브유로 살짝 구워 바게뜨 빵 위에 얹고 꼬치를 한 음식이었는데 과연 별미였다.



야외 테이블에 서서 와인과 버섯을 맛있게 먹던 안드레스는 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래서 스페인은 코로나 확진자가 많을 수밖에 없어요. 이 나라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문화적으로 불가능한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일이 끝나면 이런 거리 바에 삼삼오오 모여서 와인을 마시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죠. 그게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이에요. 코로나 때문에 그런 일상을 멈추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듣겠어요.”



그 거리의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나는 안드레스에게 한국에 대한 흠잡기를 하고 싶었다.



“한국의 확진자 수가 적은 것은 아마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잘 되기 때문인데 가만 생각해보니 한국은 원래 사회적 거리가 먼 사회가 아닐까 싶어요.”



안드레스는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모이는 걸 좋아하지 않나요?”



나는 답했다.



“모이고 안 모이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적이라는 개념을 먼저 배우죠. 제가 어렸을 때는 북한이 아주 흉측한 적이었어요. 조금 자라니까 옆의 친구가 내가 눌러야 할 경쟁자이자 적이 됐죠. 그렇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나의 적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는 게 이상한 일이 되지 않죠. 손님이 식당이나 백화점 점원을 마구 대하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죠. 그들은 단지 서로 하는 일이 다른 게 아니라 판매와 구매자의 입장에 서면 당연히 귀족과 하인으로 신분이 규정됩니다. 그것 역시 충분한 사회적 거리를 만들어주죠. 그걸 한국어로 갑질이라고 불러요.”



안드레스는 갑질? 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에게 간단한 한국어 인사말을 순례길을 걸으며 가르쳐주었지만 그 단어만큼은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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