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35 폐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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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다음날 점심때 드디어 안드레스와 재회했다. 청바지에 평상복 차림으로 나타난 안드레스는 나와 반갑게 인사하자마자 왜 산티아고에 예정보다 하루 일찍 들어오면서 자신에게 연락을 안 했냐고 따져 물었다. 연락을 했으면 호텔 대신 자신의 집을 거처로 제공했을 거라며.



나는 말했다.



“그럴까 봐 미리 연락 안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는 말했다.



“친구한테 신세 지는 건데 뭐 어때요?”



나는 말했다.



“한국인은 친구한테 폐 끼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도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면 부모님이 늘 그러셨죠. 폐 끼치지 말라고.”



곧 안드레스의 여자 친구 루트가 합류했다. 시각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는 루트는 영어는 좀 서툴긴 해도 화통하고 유쾌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함께 내가 미리 예약해둔 한국 음식점으로 향했다.



안드레스는 주물럭을, 루트는 잡채를 시켰고 나는 라면을 주문했다. 희한하게 해외에 나오면 라면이 가장 먹고 싶어진다. 아마도 현지의 식재료를 써야 하는 다른 메뉴들은 어느 정도 현지화된 맛을 내지만 라면만큼은 한국에서 먹던 맛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나온 라면은 기대와 달랐다. 국물에 토마토소스를 넣었고 현지에서 나온 각종 채소들이 토핑으로 얹어져 있어 제3의 맛이 났다. 나는 라면 맛에 대한 아쉬움을 소맥으로 달랬다. 안드레스와 루트는 내가 소맥을 만든 장면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한식을 먹은 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세 명분 식대를 한꺼번에 지불했다. 더치페이에 익숙한 안드레스가 식당을 나서며 왜 그랬냐 묻길래 나는 그게 한국 방식이라고 답했다.



“오늘 내가 쏘면 다음엔 당신이 쏘는 거죠.”



그가 마사지 숍에 데려다 주었다. 루트의 여동생이 태국에서 배운 기술로 운영하는 숍이었다. 1시간 정도 마사지를 받고 나오며 지불하려고 전대를 꺼내니 주인이 손사래를 친다. 안드레스와 루트가 이미 다 계산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새 점심 얻어먹은 빚을 갚은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사람들 학습효과가 있군.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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