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23 도착통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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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도착통





순례길 초반에 다리에 탈이 났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내가 직립 보행을 하기 때문이고 그동안 내 몸이 교통이 발달한 문명의 정주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10킬로미터 이상 걷는 일은 일부러 트레킹을 하지 않는 한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런 차에 순례길 첫날 갑자기 24킬로미터를 걸었고, 게다가 해발고도 1,400미터의 피레네 산맥을 넘었으니 무릎 관절에 무리가 온 것이다.



그런데 몸이란 게 참 신기하다. 통증을 마사지 크림으로 다스리며 열흘이 지나간 사이 휴식과 걷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다리가 2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도 크게 아프지 않은 단계가 되었다. 반복되는 장거리 보행을 통해 변화된 신체 활동을 인지한 나의 뇌가 다리에 더 많은 단백질을 공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걸을 때 힘이 들어가는 부분도 날마다 미세하게 달라짐을 느낀다. 처음에는 종아리와 무릎 관절이 뻐근하다. 며칠이 지나니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열흘 정도 되니 골반의 힘으로 몸을 밀고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듵었다. 그렇게 걷는 데 필요한 다리의 근육이 종아리부터 상체 쪽으로 올라오며 단단해지는 것이다.



나는 양손에 스틱을 잡고 리듬감을 만들며 걷는데 그 리듬은 네 발로 걷는 동물의 보행 패턴을 흉내 낸 것이다. 스틱은 다리에만 가중된 체중을 두 팔, 그러니까 앞발로 분산해준다. 정확히 말해 직립 보행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러니 더 오래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직립보행은 인간의 손을 자유롭게 만들어 문명을 배태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장거리 이동에는 전혀 이롭지 않다. 하여 걷는 동안 나는 네발 짐승이 된 기분으로 전진한다.



몸이 신기한 또 한 가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2킬로미터 전 지점부터 등에 멘 배낭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고 발의 통증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잘 참아왔던 소변도 집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참기 힘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은 몸이 정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 왔다는 안도감이 몸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걷는 사이 뇌가 의도적으로 잊게 만든 통증 신호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도착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날 걷기로 한 코스의 길이도 다리 통증과 배낭의 무게감을 다르게 만든다. 16킬로미터를 걷기로 한 날은 배낭이 16킬로그램으로 느껴진다면 20킬로미터를 걷기로 한 날의 배낭은 20킬로그램으로 느껴진다. 문제는 실제 배낭의 무게가 아니라 내가 가진 부담감이다.



순례길 걷기는 지금껏 내가 익숙해져 있었던 몸의 패턴에서 살짝 벗어나는 체험을 안겨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맞닦뜨리는 환경에 대한 심리상태가 몸의 반응과 직결되어있음도 확인하게 된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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