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36 탈출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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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탈출





마드리드까지 와서 종일 호텔 방에서 와인이나 홀짝이고 유튜브로 걸그룹 콘텐츠나 보고 있다면 사람들이 날 한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어제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한국으로 치면 집콕 생활을 한 것이다. 사촌 형네서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나와 시내 호텔에 체크인하고 저녁도 거르고 내내 잤다. 오밤중에 일어나 잠깐 담배 사러 나갔다가 담배 가게가 다 문을 닫은 걸 확인하고 길거리의 젊은이에게 2유로 주고 담배 두 개비를 샀다. 그리고 들어와 또 잤다.



몸에 피로가 누적되어서라기보다, 스페인의 수도를 구경 다닐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런 부지런함은 여행객의 미덕일 수 있겠으나 내가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은 아니다.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짐을 싸서 움직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루를 산다. 유럽에서의 90일동안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사실 그동안 나는 너무 규격에 맞춰 살아왔다. 한국 사회의 기대에 맞추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 나의 실종이다. 내가 없어졌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들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고 가장 치명적이게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세상은 규격 바깥으로 나가보려는 내 작은 야심조차 모욕 주고 배신하는 걸 일삼았다. 나는 둔감한 무례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나로선 탈출이 절실했다. 누군가는 내게 코로나가 판치는 위험한 유럽에서 뭐하냐고 채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을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나로선, 유럽에서 코로나에 감염될 확률보다 대깨문의 나라에서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더 크다.



하여 유럽에서의 한 달 남짓한 생활은 나를 자연스레 다른 공기 속으로 격리시켰다. 온전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고요를 선사했다. 마음이 자발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울 때까지 조바심 없이 기다리는 법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로 날아간다. 관광 명소는 없을지 몰라도 흥미로운 일상과 사람이 기다리는 곳.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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