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34 무뢰한

in #stimcity3 years ago


그림1.png






#34

무뢰한





그날 저녁 호텔에 딸린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의 급사는 취해 있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걸었으며 혀는 꼬여있었고 식기들을 다룰 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지배인이 다가와 그녀에게 한소리를 했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주의를 주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신 그녀는 내게 대단히 친절했는데 내가 스페인어 메뉴를 못 알아보자 주방으로 달려가 그 음식을 직접 가져다 보여주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문득 어느 한 사람을 떠올렸다. 몇 해 전 mbc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 촬영차 방문했을 때다. 기자는 장소를 물색하다 회사 디지털 뉴스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방에서 인터뷰가 끝나자 누군가 기자를 큰 소리로 불렀고 낮술에 잔뜩 취한 그 방 책임자가 기자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이 누마, 질문을 그따위로 하면 되겠냐. 네가 그러고도 기자야?”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기자의 직속 상관도 아닌 그는 취재원인 내가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기자를 모욕하며 취기 어린 목소리로 일장 훈계를 늘어놓았다.



일하면서 취한 사람, 혹은 취한 채 일하는 사람을 살면서 가끔 본다. 특히 내가 속했던 언론계에는 취재를 빙자한 음주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문화였던지라 낮술이 일상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디지털 뉴스룸의 책임자도 그런 문화에 익숙한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인사에 물 먹고 뒷방 늙은이가 된 게 서러워 애꿎은 후배 기자에게 화풀이 하고 있는 것 말고는 그 행동의 이유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삶이 힘들어 낮술에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의 고단함을 막걸리 한 잔으로 삭이는 것과 더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한 원한을 품고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취기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이해 영역 안에 있고 후자는 무뢰한인 것이다.



내가 떠나온 한국 사회가 내게 지옥이었던 건 그런 무뢰한들이 팔딱대는 술 냄새를 풍기며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걸 넘어 남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20세기소년 추천사
#01 안갯속의 여행자
#02 분실
#03 근대 정신
#04 가짜 뉴스
#05 충동위로
#06 자유의 일상성
#07 민중의 사고방식과 언어
#08 시민 의식
#09 여행자의 눈
#10 고향
#11 용기
#12 인연
#13 메타포
#14 그리움
#15 극기
#16 짝
#17 길동무
#18 내일 일
#19 단절
#20 호의
#21 민족
#22 갑질
#23 도착통
#24 우연의 산물
#25 중국 음식점
#26 불쌍한 표정
#27 계획
#28 감시
#29 이유
#30 오르막
#31 장애
#32 동기
#33 목적지

Coin Marketplace

STEEM 0.28
TRX 0.12
JST 0.032
BTC 69611.14
ETH 3805.50
USDT 1.00
SBD 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