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12 인연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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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연





파리 14구의 작은 에어비앤비 방에서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할 짐을 다시 꾸린다. 서울에서 가져온 것 중 버릴 것과 가지고 갈 것을 다시 분류한다. 그리고 배낭에 넣을 것과 옷 주머니에 넣을 것도.



신용카드와 현금이 있는 지갑과 여권을 배낭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이미 파리 도착 첫날 재킷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해졌다. 두 개는 몸에 지니기로 한다. 배낭을 통째로 도둑맞더라도 지갑과 여권이 사라지면 유럽에서 국제 미아 신세가 된다.



두 물건을 바지에 달린 건빵 주머니에 밀어 넣으려 하니 물티슈가 들어 있다. 난 도대체 이걸 왜 챙긴 거냐.



한 달 넘게 걷게 될 순례길은 이번 여행의 본론 부분이다. 서울에서부터 가볍게 떠나자고 마음을 먹고 또 먹어도 정주 생활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버리기가 쉽지 않다. 가지고 온 물건들을 노려보며 한참씩을 생각해야 한다.



면도기? 수염을 자르지 않는다. 너무 길다 싶으면 휴식도 취할 겸 호텔에 묵는다.



청바지? 버리고 간다. 파리에서도 한 번도 안 입었으니 짐만 될 게 뻔하다.



휴대폰 트라이포드? 파리에선 쓸 일이 없었지만 순례길 촬영엔 필수다.



이런 식으로 버릴 것, 가지고 갈 것을 나누고 다시 싸는 데 족히 두 시간은 걸린다.



살아오면서 나는 잃어버리기는 곧잘 했지만 잘 버리지는 못했다. 뭐든 바리바리 내 주변에 쌓아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생장행 새벽 기차를 앞두고 내가 부지불식간에 버렸던 것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확히 말해 인연들이다. 인연 가운데 짐이 되는 인연도 있다. 그런 건 버려야 한다.



다만 지고 가야 할 인연과 버려야 할 인연을 분류하는 데 있어서 나는 충분히 숙고했나를 따져보니 충동적인 경우가 더 많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충동적으로 얻는 인연, 충동적으로 폐기처분하는 인연. 그러면서도 반드시 챙겨야 할 인연은 내게 불편감을 준다는 이유로 외면하기도 했다. 15년째 연락을 끊고 사는 작은 누나처럼.



어떤 인연은 배낭이 아닌 몸에 지녀야 한다. 잃어버리면 내가, 내 정체성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인연.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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