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25 중국 음식점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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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중국 음식점





안드레스가 떠난 다음날 나는 열차를 타게 될 부르고스까지 버스를 타고 와 거리를 배회하며 혼자 남겨진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휴대폰에서 딩동소리가 났다. 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나는 오늘 저녁 부르고스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사실 그와는 사흘전 길이 엇갈렸다. 65세의 나이에도 평소 마라톤 완주를 할 만큼 걷는데 이력이 난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데다 안드레스가 하루 코스를 이틀로 늘리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산토도밍고에서 버스를 타고 부르고스까지 이동했기 때문에 겨우 챈의 일정과 맞게 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답을 보냈다.



“오우, 챈. 전 이미 부르고스에 와 있습니다. 도착하게 되면 연락 주세요.”



챈은 부르고스로 걸어오면서도 계속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이 도시에는 알베르게가 전부 문을 닫았어요. 적당한 호스텔을 찾고 있어요. 이탈리아 친구와 같이 있는데 침대가 세 개 있는 방을 쉐어하지 않을래요? “



“챈, 미안하지만 난 이미 호텔에 체크인했어요.”



“그렇군요. 부르고스 도심에 있는 이 레스토랑은 뉴욕타임스 기자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양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어요. 여가서 오늘 저녁 식사 어때요?”



“챈, 가난한 순례자가 가기엔 너무 비싼 식당인 것 같군요. 숙소 근처에 중국 음식점이 있어요.”



나는 며칠 전 안드레스에게 중국 음식점에 가자고 했다가 면박 당한 일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 음식점은 저렴한 대신 맛이 다 똑같아요.”



그는 해외에서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면 꿩 대신 닭을 찾는 기분으로 중국 음식점을 찾곤 했던 내 취향까지 헤아리진 못했다. 나는 그에게 저렴한 곳을 찾아가자는 뜻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어쩼든 안드레스는 그 동네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집만을 찾아내 식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미식가였다. 그 덕분에 오히려 식사비가 꽤 나갔다. 마침 안드레스가 떠나자 만나게 된 챈이 중국인이어서 나는 며칠전 중국 음식점에 못간 한을 풀고 싶었다.



챈은 양고기 식당이 저녁 9시나 되어야 문을 연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내 제안을 수락했다. 약속했던 중국 음식점 앞에 그와 이탈리아 친구 크리스티앙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반갑게 인사했지만 불행히도 식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7시 반에는 다시 문을 열 거예요.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을 늦게 먹잖아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론 별로 자신이 없었다. 스페인에 와서 늘 당혹스러운 게 평일에도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다는 것인데, 그건 이들에게 오후 2시부터 5시까지가 피에스타라 부르는 점심 휴식 시간이라는 걸 내가 간과했기 때문이다. 식당들도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문을 여는 경우가 허다했다. 점심을 늦게 먹으니 자연스레 저녁도 늦게 먹고, 경우에 따라서 자정 무렵까지 저녁 식사를 즐긴다고 안드레스는 설명했었다.



중국 음식점은 구글에 영업 개시 시간으로 안내되어 있는 7시 반이 다 됐음에도 내부의 불이 꺼져 있었다. 나와 크리스티앙이 불안해 하자 챈은 중국인 어드밴티지를 활용했다. 출입문에 안내된 번호로 전화를 건 그는 익숙한 중국어로 몇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분 뒤에 문을 연대요.”



그는 처음 만나 내게 마사지 크림을 건넸을 때처럼 이번에도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국 음식점에 자리를 잡고 몇가지 요리를 시켜 먹으며 챈과 향후 일정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중간 순례길을 건너 뛸 계획이라고 말했다.



“흠. 그럼 순례길 일정이 빨리 끝나겠군요. 로테르담에는 언제 올 수 있죠?”



그와 길을 걸을 때 유럽에 있는 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로테르담에 꼭 들르라고 했던 그의 말이 그때서야 퍼뜩 떠올랐다.



“아, 로테르담! 글쎄요. 제가 당신보다 먼저 순례길 일정을 끝낼테니 바로 갈 수는 없겠군요. 다시 파리로 가거나 바르셀로나에서 몇 주 머문 뒤에 11월 중순쯤 가면 어떨까요?”



“11월 중순이면 적당해요. 나도 순례가 끝나면 포르투갈에 열흘 머물다 그때쯤 집으로 돌아갈거니까요. 올 때 꼭 연락해요. 넓은 집은 아니지만 당신에게 거처를 제공할 수 있어요.”



나는 챈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며 물었다.



“챈, 당신은 정말 친절하군요. 왜 그렇게 저한테 잘 해주시죠?”



“그건 당신이 특별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내가 이번 순례길에서 만난 가장 특별한 사람이죠.”



내가 특별하다고?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특이해 보이긴 했을 것 같다. 나는 코로나 공포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순례길을 걸으러 온 유일한 비유럽권 사람이었다. 챈은 중국인이었지만 유럽에서 생활하는 사람이었으니 순례길 여기저기서 나를 신기하게 보던 시선을 그도 가지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 건 아마도 문화적인 동질감 같은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순례길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챈,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그야 물론 동방불패의 임청하. 그녀를 능가할 여배우는 없어요.”

“임청하는 정말 매력적이죠. 하지만 나는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흠, 장만옥도 예쁘지.”

“그냥 예쁜 게 아니라고요. 그녀는 여신이에요.”

“요즘에는 중국 여배우들보다 한국 여배우들이 눈에 띄더군요.”

“이를테면?”

“미스터션샤인의 김태리.”

“멋진 배우죠.”

“그렇지만 최고는 한지민이야.”



아득히 멀고 낯선 이국의 땅을 걸으면서도 나눌 수 있는 공통의 무언가를 확인하는 인연을 만나면, 바로 그 공통의 문화적 코드만으로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챈은 아마도 그런 점에서 내게 친근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걸 그는 특별하다고 표현했던 것이고.



나로선 나를 맞아줄 또 다른 인연을 갖게 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번 유럽 여행은 결국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여정이 된 셈이다. 나는 익숙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 온전히 혼자가 되고 싶어 한국을 떠나왔다. 그런데 어느새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고 그들이 내 여정의 이정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행복합니다. 유럽에 와서 오늘 밤이 가장 행복해요 “



안드레스와 챈과 이별을 고한 다음날 나도 열차를 타고 부르고스를 떠나 아스토르가로 향했다. 스페인 북부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깊어 날이 부쩍 쌀쌀해졌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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