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30 오르막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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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오르막





시나브로 나의 길은 그저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이고 지나가야 하는 곳이 되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오세브레이로까지 28킬로미터를 걸어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찼다. 동기가 증발된 행동. 원인이 삭제된 결과. 그저 걷고 또 걷는 과정 속에서 기계적으로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 걷고 10분을 쉬며 신발을 벗어 발을 마사지 하기를 되풀이 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괜찮냐고 물어온다. 그때마다 나는 별일 없다는 뜻으로 미소를 품는다.



오세브레이로까지 약 5킬로미터를 남겨두고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오르막이 만만치 않을 거라고, 순례자들이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며 나누던 대화를 들은 터라 각오는 하고 있었다. 숲속으로 난 가는 오르막길이 완만한 경사로 이어졌다. 평소 북한산을 자주 올랐던 나로선 백운대까지 오른다는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처음 겪는 경사는 힘에 부치기 마련이다. 오르막이 언제쯤 끝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길이 구부러지지 않고 직선으로 쭉 뻗어 있으면 심리적으로 훨씬 더 힘겹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채택한 오르막 심리학이 있다. 앞을 보지 않고 발 앞의 길바닥을 바라보고 걷는 것이다. 시야를 의도적으로 좁혀 마치 평지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경사도에 대한 감각과 오르막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인식 밖으로 쫓아내면 걷기가 훨씬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걷는 행위 그 자체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오르막은 마치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평지만 보고 걷다가도 어쩔 수 없이 가끔씩 고개를 들면 숲의 나무들 때문에 정상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족히 두 시간 가까이 오르고 또 올랐다. 허리가 아파오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문득 벽돌 건물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침내 오르막이 끝난 것이다. 땀에 흠뻑 젖은 나는 적당한 성취감에도 젖었다. 산꼭대기 마을 초입에 방금 오르막 숲을 통과해온 순례자들을 맞이하듯 돌 벤치가 보였고 바로 옆에 작은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배낭을 내려놓은 나는 목부터 축였다.



산골 마을엔 인기척이 없었다. 모든 게 고요와 적막 속에 있었고 다만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던 찰라였다. 문득, 마을 한쪽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고양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는 듯 다가오더니 내가 앉은 벤치 위로 훌쩍 뛰어올라 내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나는 고양이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 순간, 기묘한 평화로움과 안도감이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적막의 시공간에서 물이, 고양이가, 산등성이로 질 채비를 하고 있는 햇빛이, 서로 협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방금 숲길을 빠져나온 나를 품고는 토닥이고 있었던 것이다. 태어나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어서 나는 와락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늘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낯선 곳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냥 존재하는 것들, 사람보다 먼저 있었던 존재로부터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이런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을 쏟으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고양이는 불현듯 벤치에서 내려가더니 먼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사라졌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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