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32 동기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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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동기





영어의 관용 표현 중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I know what I am doing”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좀 이상하게 들린다. 아니, 지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도 있어? 약 먹었어? 좀비야? 고개가 갸웃해진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표현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살아간다. 일상의 쳇바퀴, 혹은 국면의 논리에 함몰되면 이유가 거세된 채 행동의 관성, 강제된 환경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대신 상황이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엇나가는 삶의 각도는 처음엔 아주 작지만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벌어진다.



순례길을 걷는 행위 속에도 그런 삶의 메타포가 있다. 이를테면 목적지가 분명하고 자신이 걷고 있는 여정 속의 좌표가 어디인지 헤아리며 걷지 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버려 한참을 더 걷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 정도는 단지 몸이 힘든 것이니 감수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왜 걷고 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접어든 뒤 나는 닷새를 꼬박 혼자 걸었다. 순례길 후반부라 그런지 길동무를 만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어쨌든 나는 이 온전한 고독의 시간을 보내며 걷는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든 것이다. 난 지금 여기서 왜 걷고 있는 거지?



세상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여기 온 동기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새 걷는 행위가 일상이 되었다. 그냥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내 몸의 체력적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왔던가? 내가 직립 보행을 하는 영장류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사람이란 분명한 동기를 가졌을 때에야 자기 행동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동기는 망각되고 걷기의 루틴에 함몰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걸 깨달은 뒤부터 갈리시아의 한적한 전원 풍경도, 스산하게 불어대는 가을바람도 특별함을 상실했다.



모든 것이 갑자기 지겨워졌다. 걷고 먹고 자는 데만 집중하는 나날들. 그 단순함에 삶의 진실이 있다는 각성은 내겐 너무 유치했다. 인간의 길이란 그 너머에 있는 무엇, 그러니까 중세의 순례자들이 이 길의 밤하늘에 떠 있는 은하수를 보며 걸었듯, 이정표를 향해 가는 이동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즉시 걷기를 멈추고 산티아고행 버스를 탔다. 내가 산티아고에 온 건 이곳이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하지만 순례길에서 만났던 스페인 친구 안드레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길에 나선 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이야기가 없는 고독한 보행은 내게 의미를 상실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아 또 다른 순례 여행을 떠날 것이다. 당장은 안드레스를 만나 한국 식당에서 라면부터 먹을 것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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