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21 민족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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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민족





어쨌든 안드레스 덕분에 나는 스페인 사회에 대한 일단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10년 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순례길이었는데 코스마다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스페인 자연에 대해 또한 역사에 대해 되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상 공짜 여행가이드를 얻은 셈이다.



비아나에서 로그로뇨로 넘어오는 길은 나바라와 라리오카의 경계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줄곧 걸어왔던 지역은 나바라 주였는데 언어가 스페인어와 다르다고 안드레스는 설명했다. 그래서 같은 지명을 스페인어와 나바라인들이 쓰는 에우스테라, 두 가지로 표기하고 있었다.



“나바라는 카스티야라는 별도의 왕국에 속해 있었어요. 그런데 15세기에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의 결혼을 통해서 가톨릭 군주라는 체제로 통합되었죠. 당시 스페인은 무슬림의 점령을 받고 있었어요.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더 강력한 왕국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에게서 듣는 스페인의 역사는 통합과 분열의 서사시였다. 중세기까지 서로 각자의 왕국을 형성한 채 경쟁해온 여러 지역이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하자 정치적 필요에 의해 통합하거나 강력한 스페인 왕조에 복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배태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까딸루냐 지역의 분리 독립 움직임은 그래서다.



“까딸루냐는 조만간 분리 독립할 거예요. 젊은 세대가 강력하게 원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스페인 중앙 정부를 아주 많이 불신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스가 설명을 이어가던 와중에 산꼭대기에 거대한 황소 모양의 입간판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광고판일까?



“저건 원래 60년 전에 기업 광고판으로 세워진 건데 어느 순간부터 스페인의 상징이 되었어요. 광고 문구를 없앤 황소 표식이 전국에 세워졌죠. 까딸루냐에선 볼 수 없어요. 그들이 다 파괴해버렸거든요.”



정치적인 이유로 여러 공동체를 하나의 국가 틀 안에 구겨 넣으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다. 민족 감정은 국가 간 경계가 희미해지는 지금도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가라는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는 지역성과 민족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인류 집단의 역사적 특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지방분권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지만 각 지역의 이해관계 충돌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기에 끊임없는 잡음을 만들어낸다.



나는 안드레스로부터 스페인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한국의 상황을 떠올렸다. 선거가 거듭될수록 뚜렷하게 갈라지는 동과 서의 정치 성향. 대구 경북은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듯 요지부동이고 지역 감정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으니 개표 결과를 보다 보면 누가 이기든 참담함이 몰려온다.



스페인이야 수백 년을 이어온 민족적 차이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임을 스스로 강조하는 우리는 도대체 왜 이 모양으로 분열돼 버린 걸까.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도 갈라졌으니 어쩌면 지금의 한반도를 신 삼국시대라고 규정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마침 그날 저녁 목적지에 도착해 저녁을 먹는데 레스토랑에 설치된 TV에서 스페인 국왕의 바르셀로나 방문을 전하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 시위 장면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까딸루냐 깃발을 흔들며 스페인 국왕의 방문이 정치적 제스처라며 비난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고 있던 안드라세스가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하듯 말했다.



“아, 정말 나는 스페인이 걱정돼요. 이러다 나라가 망할 것 같아요.”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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