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추방史] #09 여행자의 눈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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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여행자의 눈





파리에 온 지 아흐레가 지났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일단 ‘파흐동’과 ‘실부플레’ ‘메흐시’ 등의 필수어가 입에 붙지 않는다.



며칠 전 파리에서 200Km 떨어진 릴이라는 소도시에 갔는데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점원이 내게 “메흐시, 무슈”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화답한답시고 “메흐시” 대신 “무슈”라고 말하고 말았다. 나와서 혼자 민망해 낄낄 웃고 말았다.



도착한 뒤로 내내 지하철을 타고 다녀도 여전히 너무 복잡하고 촘촘한 역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내 위치와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을 안내해주는 구글 지도가 아니었다면 꽤나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어떤 노선의 전철은 손으로 직접 도어를 열어야 하는데 멍하니 서 있다가 뒷사람이 답답한 듯 대신 연 적도 몇 번 있었다.



열흘이 다 되도록 파리는 여전히 내게 낯선 고장이다. 사실 당연한 노릇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한 달 전 이곳에 둥지를 튼 유네스코 한국 직원과 저녁 약속을 했는데 그 역시 약속 장소로 오는 지하철을 잘못 타는 바람에 20분 정도 늦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 달 산 그도 그럴진대 불과 열흘 머문 내가 적응한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여행자의 눈에는 그 사회의 표면만 보인다. 사회의 작동 원리를 눈치채려면 적어도 몇 개월 이상의 적응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대개의 여행이 명소를 찾아 사진을 찍는 것과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는 것 이상의 것을 추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의 것을 살짝이라도 추구하려면 현지인과 교류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또한 언어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로선 다행이게도, 파리 인근에 정착해 사는 두 분의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목수정 씨는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명사들의 무덤이 있는 페를라셰즈로 안내해주었고, 내가 미처 몰랐던 무덤 주인공들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주말에는 저녁 식사 자리에도 초대해 함께 한 그의 지인들로부터 프랑스 사회의 이슈에 대해서도 귀동냥을 할 수 있었다. 언론의 피상적 보도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를 듣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이웃집 청년 다비드는 사진작가인데, 김정일에 의해 북한에 납치됐던 고 신상옥 감독이 북한 체류 시절에 연출한 ‘불가사리’라는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예술이 체제에 의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며 그 작품을 이용해 다음 전시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아무튼 나는 그를 통해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에게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가 꽤나 매력적인 소재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분단은,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너무 익숙해 자각이 잘 안 되지만 이렇게 해외에 나오면 오히려 낯설게 재인식되기도 한다. 아무튼 예술이 찾아 나서야 할 영역이 부조리의 세계라면, 우리의 분단이 만든 해프닝이 지구 반대편 사진작가의 시야에 포착된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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