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29

in #kr-pen6 years ago


ⓒzzoya





  “클레어랑 같이 온 거야?”
  지미는 이제 나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지미의 눈에 순간적으로 머물다 간 복잡미묘한 감정에 내 동요는 더해졌다. 갑작스레 든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그것을 촉발한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미세한 떨림을 동반한 억눌린 감정이 내 목구멍에서 유령처럼 흘러나왔다.
  “네가 클레어를 어떻게 알아?”
  사실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미가 그녀를 안다는 것에, 그녀가 지미를 안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실망감이 뒤엉키고 있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지미의 반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이제 나를 찾는 건 그만두고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아무 말도 못 들었어?”
  지미가 황당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망연자실해 있던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내뱉었다.
  “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뒤돌아서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5초도 안 걸릴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온갖 생각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대체 그녀와 지미는 어떤 관계인가? 혹시 그녀의 일과 지미가 관계가 있는 걸까? 그녀는 지미와 내가 형제임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왜 내게 그걸 숨긴 걸까. 언제까지 나를 속이려고 했던 걸까.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왜 그쪽에서 오느냐고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잠깐 담배 한 대 피웠어요.”
  그녀는 내 흡연 사실이 예상 밖이라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럴 수밖에.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까.
  “그럼 이제 갈까요?”
  그녀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잠깐만요.”

  나는 자리에 앉아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내게서 심각한 기운을 감지했음을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맨살에 닿는 밤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졌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서 은은한 빛을 내고 있는 티 라이트가 어느덧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그만큼 우리 둘 사이에 흐르던 낭만적인 분위기도 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누리고 있던 사랑과 교감으로 가슴 벅찬 시간들이 몇 년 전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의 달콤한 저녁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적어도 내게는…….

  “번호를 안 가르쳐줬잖아요.”
  나는 애써 너스레를 떠는 어조로 말하려고 신경 썼다. 그녀가 내게 말하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모르는 척 그 뜻을 존중해 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 의도가 충분히 반영됐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녀가 시선을 떨구고 애꿎은 손끝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서프라이즈 별로 안 좋아하죠?”
  “뭐냐에 따라 달라요. 예컨대 당신을 만나고, 다시 만나고, 또 만나고…… 이런 건 좋지만요. 대부분의 경우는 안 좋아해요. 생일에는 특히요. 그런데 그건 왜요?”
  “사실은 고백할 게 있거든요.”
  커다란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한번 흘끔거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원래는 서프라이즈로 아껴둔 거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젠장. 불길한 예상이 실현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숨이 멎었다.
  “사실은 저 해든 박사님 팀에서 일해요.”
  내게 치명상을 입히려던 운명의 화살이 빗나갔다. 나는 간발의 차로 내가 먼저 말했으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며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렇게 드러난 표정을 내가 깜짝 놀란 것으로 해석한 게 틀림없었다.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거 같아서…… 그냥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어요. 센터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요.”
  나는 한 방 먹은 기분에 씩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의도가 귀엽게 느껴진 탓도 있었다.
  “알게 돼서 다행이네요. 아마 센터에서 마주쳤으면 검사 수치에 영향을 줬을지도 몰라요.”
  “사실 우리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에요.”
  나는 그녀가 무심코 사용한 ‘우리’와 ‘인연’이라는 말에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요, 이 얘기도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요. 헌팅턴 비치에서 당신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전 여기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역시 모르는구나. 그날 당신을 병원으로 옮겼을 때 짐을 만났거든요. 깜짝 놀랐죠. 알다시피 짐은 이쪽 분야에서 슈퍼스타잖아요. 저도 신경과학자라고, 박사님 연구에 관심이 많다고 했더니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말했죠. 작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고. 그랬더니 명함을 주시더라구요. 관심 있으면 면접 보러 오지 않겠느냐고. 진짜 기뻐서 그날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녀가 점점 눈을 반짝이는 만큼 내 마음은 어두워져 갔다. 지미를 알고 있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녀는 자신이 숭배하는 슈퍼스타가 일으킨 기적의 산물로써 내게 호기심을 보인 거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 된 일이리라. 그게 훨씬 자연스러운 이야기니까.
  “이제 정말 일어나죠. 더 늦기 전에.”
  나는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희미하게 죽어가는 티 라이트가 담긴 유리잔으로 벤저민을 깔아뭉개고 베니토에게 눈인사를 한 뒤 가게에서 나왔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어쩐지 둘 다 말이 없었다. 멀리 해안가로부터 침울하게 스며드는 밤안개 때문이리라. 나는 애먼 옷깃만 자꾸 여몄다.

  “저 별 좀 봐요. 저건 무슨 별일까요?”
  그녀가 아직 장막이 드리우지 않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 하나를 찾아내 가리켰다. 불행히도 그건 별이 아니었다.
  “아마 인공위성일걸요.”
  “그래요? 진짜 별과 다를 바 없는데요.”
  “그래도 가짜는 가짜죠.”
  “밤하늘에서 반짝여만 준다면 상관없지 않나요?”
  “그거 참…… 과학자다운 발언이군요.”
  “과학자만큼 낭만적인 사람들도 없어요. 무언가를 깊이 탐구한다는 건 애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나는 무언으로써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미리 말하는데 택시비는 내가 낼 거예요. 나는 취하지도 않았고 그쪽 덕분에 오늘 근사한 저녁도 먹었으니까요.”
  그녀의 단호한 말투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지만 사실 내게는 현금이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엔 내가 살게요.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 가 봤어요? 골든 게이트 공원에 있는 거요.”
  “아뇨.”
  “정말요? 잘됐네요. 거기 꼭 가 보고 싶었거든요.”
  마침내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그녀와의 작별의 순간이 왔음에도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어느새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에 모종의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잘가요.”
  “잭, 뭐 잊은 거 없어요?”
  멍하니 있자 그녀가 차창 너머로 쪽지를 들어 보였다.
  “전화해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은 달콤했지만 어딘가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그녀마저도 우주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는 나를 구할 수 없을 거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또다시 불안해진 가슴을 여미고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아득한 공간감을 만들어내고 있는 안갯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불빛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그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던 밤하늘의 플레이아데스 성단처럼 희뿌옇게 뭉개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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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감상&잡담

부처님오신날 서초 고속도변 오솔길을 걷다가 나무 벤치에 잠시 앉아서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029 읽고 있습니다 고요한 푸른 숲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구름 속 어디엔가 이름 모를 별이 있겠지요
외로운 사람들이 그토록 별을 보려는지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클레어 지미 짐 수지 큐 파커 베니토 그리고 주인공 잭 다시 그들의 각각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부처님 오신 날에도 어김없이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을 걸으시는 쌤을 보니 칸트가 떠오릅니다. 일상은 반복되는 행위에 의해 강한 구심력을 갖는 듯합니다. 그것을 버티면 삶을 끌고 가는 힘이 되고, 끝내 버티지 못하면 일상을 이탈하는 힘이 되겠지요.

스스로를 감금하고 있던 잭이 혼자만의 우주를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저 넓은 우주를 다 안다고 여겼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감고 만든 어두운 우주는 눈을 뜨면 아무것도 보오지 않으니, 그 우주는 잭만이 보이는 우주. 그래서 외롭나 봅니다, 마치 눈 뜬 장님이 되어버린 잭.

속물스럽지만, 데이트할때 돈없는 남자 매력떨어집니다 ㅋㅋ

그래서 제 매력이 떨어지는 칼날이 되었군요.

아. 본인 이야기 ㅋㅋ

ㅋㅋㅋㅋ 팩트폭격입니다.

진실 + 상상이라고 하셔서 ㅋ
그 부분은 아니라 믿고싶었어요 ㅋ

어머나~ 애드님 ㅋㅋㅋ 저 혼자 빵터지고 갑니다 ㅋㅋㅋ ㅠㅠ ㅋㅋ
어쩜조아 ㅋㅋㅋㅋ

혼자 빵터진거 지금 소문 내신거죠?? 저 찍힌건가요???

ㅋㅋㅋ저도 속물이라 찔려서 ㅠㅠ ㅋㅋㅋㅋ
같이 찍힌듯요 ㅠㅠ

잭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일단 달리고 봐야지!!

잭, 뭐 잊은 거 없어요?

키스를....

여기도 선수가...

저도 설마설마... 그러다가 쪽지에서 안도했어요 ㅎㅎ

모두 같은 생각을...ㅎㅎㅎ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멍청이~~ㅋㅋ

실망이 아니라 안도를??ㅋㅋ

무언가 나만의 유토피아를 찾아서 환희에 젖어 있는데 누군가 먼저와서 라면 끓여 먹고 있는 걸 발견한 기분이겠죠? 지미는 신인가요? ...

오늘 댓글 달아 주신 비유가 모두 찰지네요. 쑤님께 과외 받고 계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하늘아래 새로운 거 없단다 잭... 지금 아무리 그녀한테서 아우라가 나와도, 곧 그녀에게도 익숙해지겠지. 비밀이 너무 많은 사람은, 그 비밀이 다 드러나면 매력이 없어지지. 흠... 계속 지켜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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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비밀을 끝없이 만들어야겠군요!

속타게 쪽지 주지말지.... ㅋㅋㅋ

역시 밀당의 고수...

유명한 사람의 고충인가요?
개인 감정으로 클레어와 꼼냥꼼냥하다가, 기분이 쎄해졌을 거 같아요.
사람을 사귀는 것에서 가장 큰 재미는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건데 말이에요...
달달하던 관계과 갑자기 사무적으로 바뀐 거 같네요.

그렇죠. 사람을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인데 지미 이 개객끼가...

언제쯤 잭은 지미의 그림자 에서 벗어날까요
잭이 안타깝네요 ~~

미세한 떨림을 동반한 억눌린 감정이 내 목구멍에서 유령처럼 흘러나왔다.

표현이 좋아서... 일단 인용해놓고 ㅎㅎ
지미가 등장해버려서....잭이 많이...민감하게 반응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클레어를 존중하고 잘 넘어갔네요. 둘 사이의 깔끔한 마무리는 아니었지만 말이죠.....아 찜찜해라....

잭은 생각보다 많이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상념과는 다르게 지금껏 보여 준 행위와 결과는 평범한 사람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죠. 술과 마약은 지역 특색으로 이해할 수 있구요.

오늘은 왠지 그냥 잭이 넘 불쌍...

분명 사랑 얘기 아니라고 하셨는데.. 꽁냥꽁냥이 계속 이어지나요? 아니면 운명이라고 믿었던 클레어를 보내게 될까요? 궁금해서 걍 혼잣말 해봅니다. ^^;

표지가 바뀐 게 힌트입니다. 그것보다 오늘 사무실 열어야 할까요?

글쿤요. 표지가 바뀐 건 잭이 이사해서 그런건줄..
29에서는 사무실 필요없었어요. 30은.. 이~따가 읽으러 오겠습니다. ^^

아... 여기가 30회인 줄 ㅋㅋㅋ

잭은 누굴 만나든 지미 이야기가 나오면 허무해지거나 흥미를 잃어버리는거 같아요. 좀 유순해질 필요가 있으야는데 ...
그리고 잭아 택시타기전 클레어한테 뽀뽀는 해줘야 하는거 아니냐!!

엇... 그게 어메뤼칸 스탈인가요 +.+

앗... ㅎㅎㅎㅎ아마도요 ^^

[끽연실] 트위터

Curse of the I-5 Corridor by Neko Case

마당발,
지미.

지미 개객끼.

저번까지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인연이 있을줄은 몰랐네요.

-_-)y~oO

운명은 언제나 장난을 치죠.

잭 바보 말미잘

침착해! 침착해! 제이 에이 씨 케이 침착해!

[사무실] 제보 및 문의

잭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미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나 보네요..
잭이 말하지 않은 그 무언가가 잭과 클레어를 이어주는 끈일지도...

플레이아데스에는 외계인이 산대요..ㅋ
헛,,, 1등

누군가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지요. 일단 한번 들어가면...

며칠만에 스팀잇을 찬찬히 하며 못읽었던 거 전부 읽었어요

내일도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함께 기다려요~ㅋㅋ

다음 이야기에서 잭과 클레어의 인연 이야기 나올까요? 기다립니다~

나올까요? 제가 슬쩍 봤는데 말이죠...

쉼스팀하고 돌아왔습니다. 소설읽고 싶은 마음에 들렀어요.
남녀관계의 미묘한 심리묘사가 정말 흥미진진해요. 막 감정이입이 되는거 같아요^^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리스팀합니다.

잘 쉬셨는지요? 쉼의 연장으로 가볍게 즐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리스팀 감사합니다 :)

그냥 해피엔딩으로 쭉 가주시면 안될까요? 넘 가혹하잖아요! 지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그 또한 잭의 운명이겠지만 말이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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