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03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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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아니 생각보다 빨리 죽을 것이다. 뭐 그것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오래 산 거겠지만. 갑자기 웬 예언이냐고? 내가 갈고닦은 능력 중 하나다. 20여 년을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망상, 아니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그런 힘이 생겼다. 그건 주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음에 이어질 대사나 장면을 추측하는 데 발휘됐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한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나는 어떤 음악이든 내가 알고 있는 거라면 어느 부분이든 1초만 들어도 맞힐 수 있다. 이것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이 잊은 음악이나 영화나 사건이나 사람이나 아무튼 그 무엇이든 앞으로 나올 것을 예상한다. 뜬금없이 그것이 떠오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나오든가 언급된다. 아무리 오래전에 잊혔을지라도. 이것이 내가 20여 년 동안 연마한 능력들이다. 말하고 보니 참으로 보잘것없군.

   20여 년 전 사고로 나는 두 가지를 잃었다. 내 자유 그리고 내 아버지. 모두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특히 남자의 인생에서는. 아직도 기억난다. 서너 살 무렵 천체망원경을 볼 수 있게 나를 들어 올려 줄 때 아버지에게서 풍기던 냄새들을. 일곱 살 무렵 머리를 맞대고 별지도를 살필 때 풍기던 그 냄새들을. 그것은 스킨로션의 산뜻한 머스크향과 옷에 베인 따뜻한 담배 냄새였다. 요즘 사내들이 풍기는 여성용인지 남성용인지 분간도 안 되는 화장품과 화학 물질로 범벅된 역겨운 담배와는 차원이 다른 냄새들. 그 냄새들은 그것이 바로 남자의 향기라고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나는 그 냄새들로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 검은 제복을 입은 경찰, 방화복을 입은 소방수, 홈 유니폼을 입은 야구선수……. 그런 걸 꿈꿔보지 않은 건 아니나 그 모두는 시각적인 이미지일 뿐이었다. 포마드를 발라 깔끔하게 가르마 탄 머리로 밝은 회색 정장을 입은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진짜 어른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 이미지에서는 머스크향과 담배 냄새가 강하게 풍겨 나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버지를 정의하면 본질의 대부분을 놓치게 된다.

   아버지는 별을 사랑한 분이었다. 우리 형제와 아버지는 밤마다 2층 창가에 망원경을 놓고 온갖 별과 성운과 은하를 우리 집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그러면 아버지는 따뜻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그들에 관한 온갖 잡다한 지식을 알려 주곤 했다. 그만 자라고 엄마가 소리칠 때까지……. 우리는 놀이공원보다 시립대의 천문관을 더 많이 드나들었고, 호수로 관측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얼마 안 되는 아버지와의 추억 중에서 별을 빼놓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유년 시절이 낭만적으로 채워진 걸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을 것이다. 바로 그 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으니까.

   어느 날 아버지는 우리가 난리부르스를 출 정도로 깜짝 놀랄 여행 계획을 발표했다. 목적지는 우리 형제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디즈니랜드와 맞바꿀 수 있는 꿈의 장소였다. 바로 그리피스 천문대였다. 여행 첫날, 우리 형제는 잠꾸러기 기질을 극복하고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흥분 때문에 전날 잠을 설쳤던 거 같기도 하고, 아예 밤을 꼴딱 새웠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 가족은 로스앤젤레스에 저녁이 다 돼서야 도착했다. 그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어차피 천문대는 밤에 살아나는 공간이니까. 문제는 우리가 천문대에 도착했을 때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그날 천문대가 자랑하는 반사 망원경을 체험하기란 글렀다는 걸 하늘에 낀 구름을 보고 아셨으리라. 아니면 일기 예보를 듣고. 그럼에도 한나절을 꼬박 운전한 몸을 이끌고 짐을 풀자마자 쉴 틈도 없이 다시 운전대를 잡았던 것이다. 철없던 우리가 아버지의 그런 기꺼운 노고를 알았을 리는 만무했다. 아마 우리는 그저 한목소리로 노래 불렀던 천문대의 망원경을 체험할 수 없다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부모님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두 번째 계획이 있었다. 바로 우리가 그리피스 천문대를 꿈꿨던 이유 중 하나인 천체투영실이었다.

   그곳에선 이미 발사된 보이저 1, 2호 등의 활약과 앞으로 목성에 도착할 갈릴레오호의 태양계 여정을 담은 필름을 상영 중이었다. 우리는 천체투영실의 돔 스크린에 펼쳐지는 우주의 풍광에 압도되어 반사 망원경 따위는 잊어버리고 불만스럽게 내밀고 있던 입을 헤 벌린 채 점점 그 안으로 빠져들어 갔다. 수성, 금성, 화성……. 반구의 스크린이 주는 현실감 속에서 우리는 탐사선들을 따라 태양계의 행성들을 하나씩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행성이 스크린 가득 떠올랐다. 기묘한 줄무늬와 기분 나쁜 붉은 눈. 누구나 아는 목성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우주의 신비로움 그 자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름 돋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천장을 뒤덮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그 얼굴을 마주한다면 경이를 넘어 경외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내 쌍둥이 지미가 바로 그랬다. 지미는 갈릴레오호가 목성을 지나는 동안 흡사 그것의 중력에 압도당한 듯 호흡 곤란을 일으켰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진정시키고 가까스로 숨을 토하게 했지만 파랗게 질린 얼굴로 구역질을 해대는 모습이 엄마 아빠를 불안케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곧장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어두운 밤, 부슬부슬 내리는 비, 구불구불한 산비탈 도로, 아픈 아들을 태운 아버지, 자신이 역주행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무작정 내달리는 음주운전자……. 그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진 끝에 사고가 일어났다. 우리 가족이 탄 차는 음주운전자의 차를 피하다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어쩐지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리려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엄마가 이미 잔뜩 붉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때에야 비로소 나는 엄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만 안 나오는 게 아니라 입술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엄마가 내 손을 잡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내 힘으로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산송장이 된 것이다. 처음에 엄마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마터면 다른 감금증후군 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뿔뿔이 흩어질 뻔했다. 사고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에야 그 병원에서 유일하게 밥값을 한 의사가 정확한 내 상태를 밝혀냈다. 나는 답답하고 갑갑해서 미칠 거 같았으나 어린애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버텼다. 얼마 있으면 곧 깨어나서 전과 다름없이 활달하게 돌아다닐 거라 믿었던 것이다.

   눈꺼풀을 깜빡여서 글자를 고르고 예스와 노를 선택하는 건 끈기와 인내가 부족한 어린애가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대화 방식이었다. 다행히 나는 교감 능력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하는 쌍둥이 아니던가. 뭐 근거가 부족한 이론이란 건 나도 안다. 어쨌든 지미는 그럭저럭 그 엉터리 이론에 힘을 보탰다. 내 생각을 눈치 빠르게 읽어 중간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빠르게 완성하며 이냥 저냥 대화 비슷한 걸 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어느 날 엄마에게 왜 아버지가 안 보이느냐고 물어보려는데 지미란 놈은 계속 엉뚱한 단어를 말하며 오히려 나를 방해했다. 분통이 터졌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태도에서 나는 그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만 눈치챌 수 있었다. 막연하게 중환자실 정도를 떠올리며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된 건 이모를 통해서다. 도무지 비밀이란 걸 담아둘 수 없는 주책 맞은 입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단서들이 직설적으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엄마는 얼른 이모를 끌고 나갔으나 내가 모든 걸 이해한 뒤였다.

   아버지는 사고 당일 돌아가셨다. 장례는 내 증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치러졌고, 내게는 아버지를 보내는 마지막 인사조차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유일한 진짜 남자인 아버지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열 살. 나는 아직 아버지가 필요한 나이였다. 지미를 원망했다. 다시는 별을 보지 않겠다 다짐했다. 많은 이들이 직접 방문하거나 편지를 보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려고 했으나 나는 듣지 않았다. 장애를 딛고 성공하거나 행복하게 사는 사례를 열거하고 심지어 그 당사자들까지 찾아와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허사로 끝났다. 내가 원하는 건 육신을 일으켜 세우는 거였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철저히 망가지는 게 나았다. 내가 망가뜨릴 수 있는 건 정신이 유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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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던 입장이라
감정이입이.. 사편으로 얼른 넘어가야겠어요

아.. ㅠㅠ 조용히 다음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와 뭔가 빠져들것 같아요~ 연재소설 스팀잇에서 봐야겠네요!!ㅎㅎ

감사합니다. 연재작은 두 작품인데 단편도 가끔 올라오니 종종 들러 주세요 :)

훌륭합니다 시간 내서 다시 읽으러 오겠습니다 멋져요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

글이 단번에 술술 읽혀지네요^^~
처음엔 소설 인줄 모르고 가슴 졸이며 읽었네요 ㅎ
1회 2회부터 읽어봐야겠네요~

소설인 줄 모르고 보면 큰일날 이야기지요. 많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

드디어 3회네요. 기다렸습니다. ^^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읽어야 할 글이 많이 밀렸네요. 나하님 연재작은 주말에 집중해서 보겠습니다.

오늘은 아버지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네요..^^

통화 잘하셨는지 궁금하네요 :)

내 삶이 별로 변하지 않은건, 내가 아버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 변화를 온몸으로 막아준 누군가가 있었을 수도 있죠. 김리님 자신이었거나.

나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변화의 여지가 없는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도 모르게 나는 변하고 있겠지만요.

남겨도 될지 안 될지 망설이다가... 용기내어 남깁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법을 아셨던 것이 아닐까요. 리님이 변하는 것을 리님의 아버님이 원하시지는 않으셨겠죠. 리님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신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그런가요. 아버지의 마음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은 저를 자랑스러워 하셨고, 어느 날은 저를 굉장히 한심하게 여기셨으니까요.

조심스러워서 댓글을 썼다가 지웠다가 무한반복...ㅠㅠ

한심하게 여기셨던 그 순간에도 리님을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감히 추측해봅니다.

저는 꽤 오래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만약 ‘아빠라면...’ 이라는 생각을 조금 일찍 했었더라면 그렇게 죄책감에 괴로워 슬픔에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 어느 부모가 당신의 부재로 인하여 사랑하는 자식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겠어요.

허락하신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감히 '고생 많으셨어요. 상당히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아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가서는 자식 자랑하고, 집에서는 아쉬운 마음에 한소리 하는게 자연스러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마이해피서클님은 감정이 풍부하셔서 털고 일어나시는게 더욱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 그랬나 봐요. 항상 저 자신을 용서하기가 제일 어려운 거 같아요. ^^

이전 같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변태 같은 평정심을 지키고 싶었을 뿐일지도요.

그 또한 이유가 있겠지요 :)

어머 1,2화 보러 가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제가 그리피스를 갔을때도 비가 왔는데 그게 기억나서 그런가 사고의 상황이 머릿 속에 그려져서 너무 맘 아파요ㅠ 감금증후군이라니 독특하고 슬픈 설정이네요. 3편을 먼저 읽었지만 다 보고 가야겠네요ㅎ 잘 읽고 갑니다:)

다녀오셨으니 더 생생하게 그리실 수 있었겠군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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