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07

in #kr-pen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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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일어나면 치즈버거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두툼한 소고기 패티 위로 치즈가 노릇하게 녹아내린 버거를 두 손으로 잡고 크게 한입 베어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그다음에는 시원한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 목구멍 가득 참기 힘든 자극에 두 눈 질끈 감고 캬 소리를 내뱉는다. 그게 바로 내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치즈와 소스가 묻은 손가락마저 남김없이 쪽쪽 빨아먹고 나면 기분 좋은 포만감을 잠시 느끼다가 누구를 흠씬 두들겨 패줄 생각이었다. 누구냐고? 뻔하지 않은가. 잘나신 닥터 해든이지.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은 건 여린 내 마음 때문이 아니다. 그간 내게 충실하지 못했던 몸뚱이가 여전히 불성실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탓이다. 그 긴 시간을 중력에 맞서 튼실히 다지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밀도 낮은 뼈와 근육이 뇌로부터 받은 명령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지미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단단히 각오해두라고 건방진 엄포를 놓았다.

   “그 여유, 즐겨두라고. 조만간 패줄 테니까.”

   가시 돋친 혀로는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센터의 온갖 관계자들이 기적을 가장한 최신 의학의 결과를 보기 위해 연이어 병실로 찾아왔다. 그들이 먼저 왔다 간 다음에야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으나 전보다 훨씬 밝았다. 엄마는 내가 깨어난 직후에 전에 없던 비명을 지르며 혼절했다가 그제야 기력을 회복한 것이다. 기쁨을 주체 못 해 벌어진 그 광경을 나는 보지 못했다.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깨어난 다음 곧바로 다시 잠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매우 명료하게 했다는 증언들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런 비슷한 말을 한 거 같기는 한데 또렷한 기억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에 관해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지미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일축했으나 정작 나는 꿈을 꾼 기억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꿈꾼 걸 확신하는 건 누가 뭐 뇌파 기록지라도 보여주며 내가 한나절 동안 렘수면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증거는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꿈에서 겪은 감정의 요동이 거울에 서린 김처럼 기억 세포에 남아 있었다. 희뿌연 장막을 거두고 거울에 비친 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저 잠에서 깨어날 때 달아나버리는 꿈의 뒷모습을 보며 그 얼굴을 기억해내고 싶은 바람일까. 아니면 기억해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좀처럼 실마리를 잡을 수 없어 찝찝한 걸까. 당장 눈앞에 주어진 과제가 나를 미궁에서 건져 냈다. 아침잠이 달아나기도 전에 지미가 몇몇 팀원을 데리고 나타나 나를 괴롭힌 것이다.

   “남자들은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 생각만 한다더니.”

   수지 큐가 놀리는 투로 말했을 때 난 그 의미를 즉각 파악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간 뒤에야 내 아랫도리에 거대한 텐트가 쳐 있는 걸 알았다.

   “여자친구 사귀는 데 문제없겠는데?”

   지미가 씩 웃으며 내 가슴에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언제는 문제 있었냐?”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지미는 팀원들 앞에서 머쓱해하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신체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를 시작하겠다며 고주파니 저주파니 자기들만 알아들을 용어로 잘난 체를 늘어놓았다. 그 치료를 담당하는 사람이 수지 큐임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더이상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이해한 건 앞으로 나와 가장 끈적한 관계를 맺을 사람이 수지 큐라는 사실이었다. 그건 단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수지 큐와 나는 재활 일정 동안 몸을 밀착하고, 살을 맞대고, 껴안고, 숨을 주고받는 등 끈적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재활. 나는 문자 그대로 모든 걸 다시 익혀야 했다. 배웠던 기억도 없는 걸음마부터, 숟가락과 포크를 쓰는 법까지. 내 몸은 사고가 나기 전 10년 간 배우고 익혔던 것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심지어 식도조차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물을 삼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잘못하면 기도로 넘어갈 위험 때문에 빨대로 조금씩 마시는 게 고작이었다. 영양분을 위장에 공급하기 위해 목구멍에 뚫은 튜브도 당장은 제거할 수 없었다.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까지는 내 앞에 아직도 너무 많은 시간과 과제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의 지나친 관심까지 더해졌다. 감금증후군 환자로 20여 년을 버텨온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인 데다, 그 환자가 재활하는 과정 또한 기록된 바 없었기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그 긴 세월을 시체처럼 누워 지내면서도 버텨 온 내 정신은 단 며칠 만에 조바심을 넘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튜브를 제거하고 간신히 숟가락을 쥐는 정도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저녁 식사 때마다 나를 지켜보는 엄마가 불편해졌다. 엄마 역시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엄마는 늘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이른바 나는 너를 믿는다는 상투적 표현의 다른 버전이나 다름없었다. 숟가락 위에 놓인 으깬 감자가 바들바들 떨며 내 입을 향해 다가오다가 툭 떨어지면 엄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매번 그렇게 도와주는 것에, 애 취급하는 것에 진저리가 나서 몇 번 싸운 끝에 힘겹게 얻은 기회였다. 나중에는 지켜보는 것조차 짜증 나서 식사 시간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아침과 점심은 공식적인 재활 치료 프로그램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수지 큐의 도움을 받았다. 어쩐지 엄마보다는 생판 모르는 여자의 도움을 받는 쪽이 한결 속 편했다. 수지 큐는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나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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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베팅은 망했군요! ㅋㅋㅋㅋ
그래도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좋습니다!
수지큐가 자꾸 등장하는데, 어떤 러브라인이 또 있을지...ㅎㅎ

얼른 벌떡 일어나서 자유롭게 돌아다녔으면 합니다.

손모가지 안 걸어서 다행ㅋㅋㅋㅋ 제가 유도한 거지만ㅋㅋ 죄송합니다😂

그 다음은....수지 큐와 연애가 잘 안된다에 걸어보겠습니다 ㅋㅋㅋ
(물론 손모가지는 빼구요 ㅎㅎ)
전 속이 거멓나봐요 ㅋㅋ죄다 실패에다 베팅을 하네요 ㅋㅋㅋㅋㅋ

천천히 두고 봅시다. 손모가지는 소중하니까요ㅋㅋㅋ

연재소설...
6회를 처음 접했는데...
거슬러 올라가봐야겠네요 ㅎ

정주행인가요? 감사합니다 :)

주인공이 깨어난 것이 맞군요~~^^ 재활 이후에 신체적인 기능을 회복하면 주인공이 무슨 일을 할지 기대되네요. 수지큐와 관련된 이야기도ㅋ

이 댓글 어쩐지 음란서생적 관점에서 쓰신 것 같은 느낌 아닌 느낌이...

아아..저도 모르게 그만,,;; 제가 말한 '신체'라는 것은 포괄적 개념으로서..특정 부위를 말함이.. 아니..며.. -_-ㅋ

괜찮아요. 변태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저희 클럽 자리 아직 많습니다.

어디어디요? -.-;; 에헴. 이런 제안은 스팀쳇으로.. 음란서생도 체통이 있는지라..

가입 문의는 변태들의 지주이신 김리님께... ㅋㅋㅋ

앞으로 지미에게 어떤 식으로 복수할지 궁금해요.
그리고 치즈버거 너무 먹고 싶네요^^

치즈버거 테러가 먹혔으니 이번 회도 목적을 이뤘군요 :D

아.. 지난회 여파로 수지큐만 볼드, 회색음영 처리 되어보여져요! 작품에 몰입이 안되요ㅠ 흑..

최고로 몰입한 상태로 보입니다만ㅋㅋ

쳇.. 아시면 더 써주시던가ㅋㅋㅋ

nsfw 한번 걸어볼까요ㅋㅋㅋ

+_+
흠.. 정신차려야지.. 오래뵙고 싶어요ㅋㅋㅋ

수위 조절이 적절해서 인가요...흐
얘기가 점점 더 흥미진진해 지네요 ;D
조금 짧은가 싶다가도 내용 전달이 충분한 것도 놀랍습니다

욕심은 여기서 더 길게 가져가고 싶은데 스팀잇에선 이 정도가 맥시멈인 거 같습니다ㅠㅠ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서 처음부터.ㅎ
읽어본거 같기도 한대..
아무튼 오늘도 잘 보고 가요.ㅎ

내친김에 정주행인가요? 감사합니다 :)

지미에 신약이 기적을 일으켰네요
신약은 배신을 하지 않았네요
어떤 엄마도 이 기적에 기절할수 밖에 없었을거에요
깨어난 것을 축하합니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날것 같네요
기대하겠습니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시작인 것 같죠? 오늘도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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