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5-3) : 이기와 이타의 경계 ; 동전의 양면

in #kr6 years ago (edited)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5-2) : 이기와 이타의 경계 ; 이기와 이타의 진화 下에서 이어집니다.

시저.jpg

이기와 이타의 경계


동전의 양면


사랑의 내집단과 증오의 외집단

집단 수준의 자연선택에 따르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놓인 선악의 골짜기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강한 이타주의가 머무는 곳에는 강한 이기주의가 찾아오고, 강한 이기주의가 자리한 곳에는 또한 강한 이타주의가 따라온다. 도킨스가 논증한 바와 같이 개인 수준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도 있지만, 가장 끔직한 형태의 이기주의와 가장 고결한 형태의 이타주의는 주로 집단을 경계로 발생해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사랑으로 서로 결합하거나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려면 공격할 만한 외부인이 있어야만 한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1]

실제로, 선명한 집단의 경계는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여겨지는 가치들마저 작동을 달리하도록 만든다.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조지 타마린이 수행한 한 실험은 인간이 가진 도덕의 이중 잣대를 잘 보여준다. 타마린은 유대교 문화에서 자란 8~14세의 이스라엘 어린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여호수아기』의 예리코 전투 장면을 읽어주고, 그것이 올바른 행동이었는가를 물었다. 이때 한 집단에게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명칭을 그대로 써서 읽어주었고, 다른 한 집단에게는 얄궂게도 이 이름들을 각각 ‘린 장군’과 ‘3000년 전의 중국 왕조’로 바꾸어 읽어주었다.[5]

여호수아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고함을 쳐라. 주께서 저 도시를 너희에게 주셨다. 저 도시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여 주께 바쳐라. ······ 하지만 은이나 금, 동이나 철로 만든 집기들은 모두 주께 바칠 것이다. 그것들은 주의 금고에 넣을 것이다.” ······ 그들은 남녀노소, 소,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없앴다······. 그리고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오직 은과 금, 동이나 철로 된 집기들만 모아 주의 집에 있는 금고에 넣었다.

한마디로 예리코 전투는 잔혹한 제노사이드의 기록이었다. ‘린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던 아이들 또한 집단 학살 행위가 나쁜 일임을 잘 아는 듯했다. 아이들의 75퍼센트가 ‘린 장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고, 고작 7퍼센트만이 그의 행동에 찬성했다. 하지만,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들었던 아이들은 전혀 다른 가치 체계를 보이는 듯했다. 놀랍게도 66퍼센트의 아이들이 ‘여호수아’의 학살 행위에 찬성했고, 26퍼센트가 그에 반대했다. 더욱이 26퍼센트의 반대 의견 중에는 “아랍인의 불결한 땅에 들어갔다”든가 “동물과 다른 재산을 전리품으로 남겨놓지 않았다”와 같이 집단 학살과 관련 없는 비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5] 종교라는 분명한 경계가 도덕적 판단을 적용하는 한계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듯 집단에 대한 소속감은 안으로는 구성원들을 더욱 너그럽고 헌신적으로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밖으로는 적개심이 되어 그들을 더욱 가혹하고 폭력적으로 만들어 버린다.[1] 안으로 굽은 팔이 건네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휘두르는 증오는 때로 너무나도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집단의 심각한 부작용은, 각종 집단을 해체하여 법과 제도로만 개개인을 점점이 연결해야 바람직하지 않은가 회의가 들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이기와 이타의 경계를 허물고 소속감과 적대감을 뭉뚱그려 낼 수 없다. 또한 마음의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여 오로지 이타적인 존재가 될 수도 없다. 잠깐의 의지로는 수십만 년 동안 형성된 인간의 본성에 맞서지 못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단을 구분하고, 하는 수 없이 소속감을 갈망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누릴 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훨씬 건강하다. 사회적 결속력은 면역을 강화하고 고통을 경감시키며, 수명과도 관계된다. 구체적인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교류가 활발한 사람에 비해 심장질환이 생길 확률이 두 배나 더 높으며, 흡연은 사망률을 1.6배 높이지만 사회적 고립은 사망률을 2배나 높인다.[1] 집단을 이루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본능적인 불안과 긴장이 우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불안정을 감수하면서도, 끊임없이 무리를 갈라 타인을 헐뜯으며 소속감을 얻고, 이로써 심리적 안정을 찾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유전자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위해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무리 짓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왓치맨.JPG

닥터 맨하튼은 스스로 인류 공통의 적이 됨으로써 지구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는 이타성이란 곧 이기성의 뒷면에 존재하는 본성임을 알았다. (영화 「왓치맨」, 2009)

감정의 힘

인류는 그동안 이성의 힘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이성은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도록 주어진 특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동의 근거를 줄곧 이성에서 찾아 왔다. 이기적인 행동을 원할 때에는 이타심을 감정적인 것으로 매도하며 이해타산을 이성적인 것으로 치장했고, 이타적인 행동을 원할 때에는 이기심을 감정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도덕을 이성적인 것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인간이 결코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적이지 않으며, 이기심과 이타심이 동전의 양면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행동의 근거를 이성에서 찾을 수 없다. 이타주의를 감정의 문제로 다루려면 이기주의 또한 감정의 문제로 여겨야 하고, 이기주의를 감정의 문제로 취급하려면 이타주의 역시 감정의 문제로 간주해야 한다.

일례로, 과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정치적 자유를 빼앗기며 발생한 ‘생각의 무능’에서 비롯되었다고 통찰하였다. 그녀는 권력에 의해 생각이 마비되고, 곧 평범한 인간의 비루한 본성이 악을 자행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녀는 본성적인 악을 막을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의 힘’을 강조했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진부함(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은 이제 인간을 묘사하는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다. 그러나 아렌트의 이 같은 주장은 도덕을 ‘인간성’으로 보아 이성과 연결시키는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녀는 그녀가 인간다운 미덕으로 믿었던 두 요소를 엮어 인과관계를 넘겨짚은 것이다. 타마린은 이스라엘 어린이들에게 여호수아의 행동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다양한 답변을 받았다. 아렌트의 말대로라면 66퍼센트의 생각은 ‘생각’이 아니고, 26퍼센트의 생각만을 ‘생각’으로 여겨야 할까.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은, ‘악의 진부함’으로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른 평범한 인간 탓에 발생했다기보다, 외집단과 내집단의 경계를 가진 평범한 인간 탓에 발생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한나 아렌트는 내가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깎아내린다고 불평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성이 하는 일들을 보자면, 여전히 이성은 과대평가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성은 판단을 내리는 역할이 아니라, 감정이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역할에 가깝다. 특히 이성이 사후 합리화에 더 큰 활용을 보인다는 점에서, 나는 깨어있는 이성의 힘을 믿기 어렵다. 이미 자본주의의 상인들은 이를 깨닫고, 결코 소비자의 이성에 판매를 호소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매대의 위치부터 진열품의 가격까지 인간의 감정 작용을 겨냥함이 더 낫다는 사실을 수익으로 확인했다. 우리의 이성은 구매할 이유를 만들기에 급급할 뿐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트롤리 딜레마의 사고 실험에서 단순히 철로를 변경할 때와 누군가의 등을 떠밀어야 할 때 보이는 도덕적 차이는 논리가 아닌 감정의 문제였다.[10] 강아지까지 이타주의를 확장하여 그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면밀한 이성적 논리를 바탕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렌트의 생각과 달리,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닥쳤을 때 역사적 파국을 막는 것은 ‘생각의 힘’이 아니라 ‘감정의 힘’이다.

다만,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우리의 감정이 타인을 ‘그들’ 아닌 ‘우리’로 느끼게 해줄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환경은 물리적인 설계가 될 수도 있고, 사회의 문화가 될 수도 있다. 하나, 내가 여기에서 종 예외주의를 다루며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학습’이다. 물리적 설계나 사회의 문화는 개인이 실행할 수 없는 수동적이고 거창한 담론이다. 학습으로 얻은 정보 역시 개인의 감정을 둘러싼 환경이 되고,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 나아가 주체 스스로 감정의 올바른 반응을 위해 사전에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예외주의의 부작용을 알고 이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양한 대상과 접촉하고 공감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힘을 거스를 수 없지만, 미리 물이 지나갈 도랑을 파고 그 힘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대세적인 성향을 바꾸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여기에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다른 동물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른 인간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직면할 때, 우리의 감정이 내릴 판단은 이전과 달라질 수 있다.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6) : 마치며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1] Begue, L. (2013).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이세진 (번역). 서울 : (주)부키. (원전은 2010에 출판)

[2] Burgess, R., Yang, Z. (2008). Estimation of Hominoid Ancestral Population Sizes under Bayesian Coalescent Models Incorporating Mutation Rate Variation and Sequencing Errors. Molecular Biology and Evolution, 25(9), 1979–1994.

[3] Call, J. and Tomasello, M. (2008). Does the chimpanzee have a theory of mind? 30 years later.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12(5), 187-192.

[4] Dawkins, R. (2006). 이기적 유전자(30주년 기념판). 홍영남 (번역). 서울 : 을유문화사 (원전은 2006에 출판)

[5] Dawkins, R. (2007). 만들어진 신. 이한음 (번역). 경기도 파주 : 김영사 (원전은 2006년에 출판)

[6] de Waal, F. (2005). 내 안의 유인원. 이충호 (번역). 경기도 파주 : 김영사 (원전은 2005년에 출판)

[7] Diamond, J. (1996). 제3의 침팬지. 김정흠 (번역). 서울 : 문학사상사 (원전은 1993에 출판)

[8] Diamond, J. (2013). 총, 균, 쇠(개정). 김진준 (번역). 서울 : 문학사상사 (원전은 2003에 출판)

[9] Doker, J.(2012).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신예경 (번역). 경기도 파주 : (주)알마. (원전은 2008에 출판)

[10] Greene, J. D., Sommerville, R. B., Nystrom, L. E., Darley, J. M., and Cohen, J. D. (2001). An fMRI Investigation of Emotional Engagement in Moral Judgment. Science, 293, 2105-2108.

[11] Locke, D., Hillier, L., Warren, W., Worley, K., Nazareth, L., Muzny, D., [...] Wilson, R. (2011). Comparative and demographic analysis of orang-utan genomes. Nature, 469, 529-533. doi:10.1038/nature09687

[12] Nater, A., Mattle-Greminger, M., Nurcahyo, A., Nowak, M., Manuel, M., Desai, T. [...] Kru¨tzen, M. (2017). Morphometric, Behavioral, and Genomic Evidence for a New Orangutan Species. Current Biology, 27(22), 3487 - 3498.

[13] Prado-Martinez, J., Sudmant, P., Kidd, J., Li, H., Kelley, J., Lorente-Galdos, B. [...] Marques-Bonet, T. (2013). Great ape genetic diversity and population history. Nature, 499, 471–475. doi:10.1038/nature12228

[14] Williams, J. M., Lonsdorf, E. V., Wilson, M. L., Schumacher-Stankey, J., Goodall, J. And Pusey, A. E. (2008). Causes of Death in the Kasekela Chimpanzees of Gombe National Park, Tanzania. American Journal of Primatology, 70, 766–777.

[15] Wilson, D. S., Sober, E. (1994). Reintroducing group selection to the human behavioral science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7, 585-654.


저자의 다른 글





Sort:  

종교만이 아니라 국가의 역사에서도 자국의 정벌과 타국의 정벌을 다르게 보는건 흔하죠 ㅎㅎㅎㅎ

그러합니다. 건덕지만 있으면 편을 가르니ㅎㅎ

'이성적으로 봤을때... ' 라거나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라는 문장을 자주 쓰는 사람일수록 더 감정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사람들은 자신이 결여된 걸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처럼 저는 감정을 자꾸 찾는 걸 보면, 저는 감정이 다소 결여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진짜 그렇습니다)

Authentic post! glad to know there are creators like you here. If you wanna see similar post, check my post as well.

일단 왓치맨을 봐야겠어요.

왓치맨 제가 정말 좋아하는 히어로 무비입니다. 보통의 영웅물답지 않게 어두운 분위기가 매력적입니다.

사람마다 '우리'의 경계가 다른 것 같아요.

심지어 계속 변하지요ㅎㅎㅎ

잘 봤습니다.

선택하는 단어들이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나름 '제가 갖는 생각들도 의미가 있구나' 하게 됩니다.

의식이 충분히 분화발달하기 전에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것 중에 하나가 집단적인 것일 겝니다. 그래 놓고는 오랜동안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안에서 많은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듯 합니다. 따라서 집단적인 가치나 규범은 성찰해야할 부분이란 생각입니다.

이성 또한 이성이란 이름으로 오용되거나 혹은 정말 이성적으로 이성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들을 통제하느라 힘에 부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거대 담론은 잘 모르지만 사회의 변화라는 것이 개인들의 변화가 선행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기에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들에 대한 성실하고 섬세한 바라봄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살려합니다.

다시 한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꼼꼼히 읽어주시고,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그들만이 스스로
무한하게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단을 이루지 않으면 그 무엇도 할수 없는 나약한 존재기에
결국 그 집단의 힘으로 문명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인간은 나약하지요...

정말 나약합니다... 혼자서는 강한 육체도 바른 정신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지요.

'학습' 이라는 부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팅하신 에세이를 처음부터 하나씩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번 연재는 쓰다보니 분량이 꽤 긴 에세이가 되어 버렸습니다ㅎㅎ

잠자는 왕자님께서 잠못들고 이글을 쓰셨다고 생각하니 히히 정성스럽게 댓글을 달아야 할것 같습니다. 아래목차도 몇번이고 수정해서 만들었을꺼라 짐작하고 나중에 소스코드 슬쩍 써야겄습니다. 며칠동안 PEN 공모전 글 모두 보느라고 왕자님의 글을 스킵해뒀다가 지금 가져갑니다. 보파 회복이 어느정도 되고 제일 먼저 풀봇 날렸지요. 물론 다른 고래님들만큼이야 못하지만. ㅋㅋ.


우선 왕자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왕자님의 견해에 반박하는 건 아니고요. 글을 읽으면서 불교에서보는 몇가지 생각을 제가 이해한 부분을 정리합니다.

이타주의, 이기주의 등 ~주의를 불교에서는 제거해야할 사견(邪見)으로 보지요. 즉, 제거해야할 대상이지요. 왜냐하면 사견이라는 것은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든요. 이 사견때문에 모든 번뇌 나아가서 전쟁이든 분란들이 조장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견(正見)은 무엇이냐하면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거지요.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때문에 괴로움을 초래할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고착화된 실체가 없다(무아)라는 것이지요. 이 삼법인을 벗어난 견해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증거가 있다면 찾아보라고 오히려 따지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논사들이 논쟁을 하다가 많이들 과열되어 대론자들로부터 죽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학회에서 니잘났다 나잘났다 자랑질하다가 감정싸움이 격해져서 교수끼리 으르렁대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이성에 대하여서는 불교인식론에서 이렇게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인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1)현량(現量/직관), 2) 비량(比量/언어가 개입)이라고 보고 비량을 넘어서 현량에 다가가게 되면 삼법인을 체득(직접 체험하여 얻게됨)하여 증지(證知)를 얻는다는 것이지요. 즉 비량은 언어가 개입되는데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분리하는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사견도 바로 이 비량이란 놈때문에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량을 통해서 사유를 발전시켜서 현량(직관)까지가고 나중에 증지를 이룬다고 합니다. 수행을 통해서요. 그 수행이라는 것이 위빳사나인데 正念, 즉 바른 알아차림이라는 거지요. 사실 감정도 어찌보면 비량에 속하겠지요. 비량을 통해서 아는 것이니까요. 단지 감정은 느낌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식의 밑바탕은 바로 안다는 것자체이니까 결국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인식하는 존재의 밑바탕에는 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앎이라는 것이 아주 깨끗하고 맑은 앎, 즉 청정심(淸淨心)이라하고 이를 불성(佛性)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량을 통해서 바른 생각(사유/비량)을 하여 청정심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즉, 이타주의이든 이기주의이든 종교든 어떤 주의가 개입되어 어떤 사고의 틀을 형성한 것은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속에서 계속 답습되어온 문화때문이지요. 이를 습기(習氣)라고 부르는데 이를 제거하는 툴이 바로 삼법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법인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성(비량)을 통해서 사유함에서 시작할수 밖에 없지요. 이점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가치판단을 할수 있는 이성속의 그 무언가가 인간의 뇌속에 프로그램되어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유물론이나 유심론이아닌 둘다론이지요.)정도로 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의 고갱이가 소속된 문화의 영향을 받기때문에 이렇게 비윤리적 학살 뭐 그런것들이 생기는 것같습니다. 즉 타파해야할 사견이겠지요.


자비심 즉 선에 관하여서는 윤회론이 개입되는 것 같습니다. 즉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지요. 나쁜일을 하면 반드시 그대로 받는다는 것이 윤회론이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암만 나쁜일을 하더라도 잘먹고 잘산다면 타자가 볼때 이건 억울하겠지만 이생이 아니더라도 다음생에서 반드시 우주의 응징을 받는다는 거지요. 그렇기때문에 선/자비심을 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리심을 발하여서 중생구제를 한다는 대승사상이 엄청 커보입니다. 내가 지옥에 가서 대신 벌을 받더라도 지옥중생을 한 사람이라도 구제하기 전까지는 해탈도 마다하겠다는 그러한 무시무시한 미륵의 보리심은 어찌보면 윤회론에 근거한 믿음이라고 볼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여기에 희생이라는 미덕도 추가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해야 한다당위성으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사견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지요.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한다는 것은 바로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어리석음으로 경계하거든요. 이는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청정심/불성이란 자비심/선한 마음이 바탕으로 깔릴수밖에 없다는 논리거든요. 즉 자비심과 지혜를 내재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쁜짓하면 우주가 알아서 나중에 벌주니까 말이지요. 그렇다고 벌주니까 착한일해야한다는 그런게 아니고 알아서 착한일을 하게된다는 거지요. 여기서 알아서라는 것이 바로 의식수준/차원인거 같은데 인간과 동물을 구분지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도 됩니다. 물론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 아주 많지만요. 그래도 그러한 개차반 인간말종의 밑바탕에 이런 이란 그 무언가가 인간의 뇌속에 잠재해 있는거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정리 하고자하는 바는 잠자는왕자님께 따지는게 아니고 저 혼자 요기 멋진 포스팅 밑에 댓글을 달아서 나중에 저의 사유 흔적을 다시 밟아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리스팀도 하고요. 그니까 혹시라도 불쾌한 감정이 없으셨으면 합니다. 제맘알죠?

ps. 프린스가 이쁜여자랑 옴팡지게 키스하는게 부럽지 않아요? 저는 옛날에 이거 보면서 저런여자랑 자고싶다는 생각 많이 했습니다. 히히.

정성스러운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불쾌할까 걱정하시다뇨. @peterchung님의 글이 반박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생각의 차이를 보는 것도 또한 재미 아니겠습니까. 심도있는 대화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peterchung 님 덕에 불교 사상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peterchung님의 글에서 약간이나마 이해한 바에 따르면, 불교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생명에 대한 희망이 더 큰 듯 합니다. 저는 인간이 진화의 산물로서 가지게 된 마음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불교 사상은 이를 극복하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 성질을 알고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불교는 이 사견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제가 가진 전(前) 공무원/ 현(現) 공돌이의 시각에서는, 해탈의 경지가 진짜로 존재한다하더라도 이는 지나치게 가우시안 그래프의 극단에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각과 보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에는 불교의 수행이 너무 가혹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한가지 재미난 상상을 합니다.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에서 '천상의 피조물' 에피소드를 보면, AI로봇이 출가하여 부처가 됩니다. 절의 사람들은 이 로봇의 깨달음을 우러릅니다. 만약, 정말 불교의 가르침대로, 사견들을 제거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이라면, AI 로봇이야말로 가장 쉽게 불교적 깨달음과 해달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첨언하자면, "이타주의든 이기주의든 어떤 주의라는 것은 그동안 답습되어 온 문화 때문이다"라는 견해도, 저의 생각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본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침팬지 집단마다 고유의 문화가 있고, 인간이 어떤 문화를 퍼뜨리면 집단의 문화가 변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본성을 넘어서는 문화를 가르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팬지에게서 보이는 이타주의나 이기주의가 문화의 영향보다는 본능의 영향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이 문화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인간을 홀로 살게 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정신병에 걸려 버리고 말것입니다. 모든 문화는 본능이라는 토양 위에 싹틀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문화가 가진 힘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글에서도 언급하였듯, 감정의 환경으로서 우리는 문화를 길러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에서 꾸준히 학습하고 발전하여 과거와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보이는 생각의 차이는, 본능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1. 키드키득, 가우시안 그래프의 극단, 표현이 넘 좋아요. 백퍼공감!
  2. 인류멸망보고서는 꼭 봐야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님 법문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AI에게 삼법인을 프로그램화 해놓으면 아주 좋을것같다고요. 그런데 이 영화가 딱 그거 같습니다. 불교 용어중에 평정(捨) 상태가 있는데 이게 바로 우리같이 감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AI의 기본 속성인것 같습니다. 담백한 것이지요. 선과 악을 똑같이 보는 것. 아주 중립적인 거지요. 하지만 맹탕하고는 다르지요. 좀 나아간 생각인데요. 불교적 시각에서는 AI를 생명체로도 볼수 있을거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생명체란 識(식: 아는마음)불연속의 연속으로 보거든요. AI가 보는 마음/즉 아는 마음이 발생한다면 결국은 유정중생으로도 볼수 있지요.(유정중생에 대한 이야기는 밑에 글에 있습니다.) 이 시각은 제 견해일뿐, 그러나 이를 좀더 전문적으로 파고들면 '아뢰야식' 혹은 '바왕가'라고 불리는 생명지속식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인간이 출생하는 과정을 서술한 경전도 있습니다. 아주 치밀해요. 사람이 죽는 과정과 태어나는 과정, 그리고 죽음과 태어남의 사이에서 생명지속심이 경험하는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요. 읽다보면 확인해보고 싶지요. 그런데 그놈의 가우시안의 한가운데에 있는 종자이다보니 그걸 볼수 없어서 문제이지요. 그런데 좀더 생각해보면 AI가 아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AI의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AI가 창조된 것은 인간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을 가진 어떤 존재가 생성되는 시대적 계기가 되어서 출현(합생)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즉, 불교식으로 표현하지면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하지요. 원인과 조건에 따라서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AI가 생기게하는 원인이긴 하지만 절대 원인은 아니고 수많은 원인중의 하나이겠지요. 즉 개연성의 파동이 현실화되어서 창발? 그래서 AI가 출현된 거지요.
  3. 생각의 차이는, 본능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둘다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한쪽만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둘다 긍정이지요. 복합적이겠지요. 그런데 불교에서 보는 시각에서는 그 본능이라는 것이 왜있을까?라는 물음표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즉, 본능이라는 것이 결국은 '나'라는 집착심에서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이라는 것이지요. 즉 그 어리석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진화가 일어난다는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사실 인간과 동물에 대해 구분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세간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 기세간에서도 욕계, 색계, 무색계 그리고 기세간을 뛰어넘은 출세간, 이렇게 나누거든요. 그중에 인간과 동물은 욕계의 구조에서 축생과 인간계로 따로 분리시켜 설명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것도 퉁쳐서 유정(有情)중생이라고 표현하지요. 즉 감정을 가진 중생이란 표현인데, 곰곰히 생각하자면 본능이라고도 볼수 있지요. 출세간이 아닌이상 기세간의 중생들은 모두 무명(어리석음)때문에 윤회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유익한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AI에 대한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Congratulations @sleeprince! You have completed some achievement on Steemit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Award for the number of comments
Award for the number of upvotes

Click on any badge to view your own Board of Honor on SteemitBoard.
For more information about SteemitBoard, click here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Upvote this notification to help all Steemit users. Learn why here!

@sleeprince님 참고문헌이 완전 제 책꽃인데요? ㅋㅋ
원서 빼고요
ㅋㅋ 린 장군실험은 유명하죠 ㅎㅎ 편견을 싫어하시는 군요..

이방인을, 외집단을 잠정적 적으로 간주하는 집단의식은
수만년동안 모든 동물들의 유전자속에 녹아 있지 않을가 싶어요
최근들어 인쇄술을 넘어 인터넷의 스마트 폰의 파워가.
[민주주의 평화] 즉 대의민주주의가
인간의 배타성에 변화를 가져올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ㅎㅎ

네, 제 글의 주제가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는 의식이 유전자에 녹아있는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종 예외주의』라는 제목도 '인간 그까이꺼 큰 차이 없다'를 말하고 있고요.

다만, 저는 인터넷 세상을 조금 위험하게 바라보는게, 우리의 진화에서 신체적 접촉은 동질감을 느끼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지만, 온라인에서 우리는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슈아 그린이 피실험자에게 트롤리 딜레마의 질문을 하고 뇌의 MRI 영상을 찍었을 때, 누군가를 밀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에 공감하는 영역이 활성화 되었던 반면, 트롤리의 방향만을 바꿀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 영역이 활성화 되지 않았습니다.[10] 이러한 점에서 저는 온라인 공간이야말로 상대를 타자화하고 집단화하여 특유의 잔혹함이 살아나기 쉬운 공간이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 우리가 인터넷 교육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만약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정말 현실감이 살아나는 환경이라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29
TRX 0.12
JST 0.033
BTC 63855.79
ETH 3113.00
USDT 1.00
SBD 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