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에세이] 나의 글짓기 취향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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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곳곳에서 “글을 잘쓰는 법”에 대해 보고 듣습니다. 문장은 간결하게, 쉽게 더 쉽게 쓸 것. 문단은 논리 구조를 지킬 것. 금언과도 같은 글쓰기 법칙은 “잘 쓴 글”에 대한 기준을 세워 줍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글짓기의 틀 속에도 취향이란 분명히 존재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운 글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글일 수 있습니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모든 글을 재단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에게도 글을 보는 취향이 있고, 이와 닮은 글짓기의 취향이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글을 대하는 방식을 한번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글을 보고 쓰는 취향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라는 말로 함축될 수 있습니다. 그간 제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글에는 인용이 참 많습니다. 「과학 에세이」로 처음 올렸던 양자역학, 경제학, 그리고 진화론에서는 장하준 교수의 강의를 인용하였고, 미래에는 음성 언어가 사라질까?에서는 미치오 카쿠 교수의 강연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블록체인과 미래 사회, 미래 기술이라는 글은 앨빈 토플러클라우스 슈밥, 미치오 카쿠, 게르만 그레프의 견해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최근의 연재글인 종 예외주의 리처드 도킨스, 존 도커, 제레드 다이아몬드, 프란스 드 발, 제인 구달 등 여러 학자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인용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나 책 좀 읽었다”고 허세를 떨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순히 그들의 이름값으로 덕을 보려는 이유도 아닙니다. 저는 제 미약한 능력을 인정하는 까닭에, 거인의 어깨를 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생각이란 수 천년간 쉼없이 자란 거인의 키에 비하면 살강 위에 살짝 앉은 먼지의 두께에 불과합니다. 제가 그들의 어깨 위에 서지 않는다면, 제가 논의하는 수준은 아무리 가까워도 2천년 전에 머무르게 될 터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방식을 지겹고 메마르게 볼지 모릅니다. 일상의 가벼운 관찰에서 오는 통찰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울사 이 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로 암송되는 황조가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에 자신을 빗댄 문학적인 글이 더 매혹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꼬장꼬장한 머릿속은 자꾸 “진짜로 암수가 정다운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두 꾀꼬리는 한창 싸우는 중일지 모르며, 정답다고 해도 암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기에서 바로 선인들의 지혜를 찾아보게 됩니다.

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서 함부로 유추된 결론을 싫어합니다. 사실 관계가 문학적 감수성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펄펄 나는 저 꾀꼬리가 사실은 싸우는 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서글펐던 감정이 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물며 견해를 피력하는 글은 더더욱 명확한 근거를 가져야 합니다. 과거, 문명의 자연파괴를 비판하기 위해 수시로 인용되었던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은 출처가 소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고운 말을 가르치기 위해 “착한 말을 듣고 자란 양파가 더 잘 자란다”는 낭설을 근거로 대곤 합니다. 제가 글을 읽고 씀은 고작 서로의 결론에 맞장구 쳐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글 속에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과 논박이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저는 얄팍한 껍데기에서 얻은 일시적인 감상보다는, 단단한 내용물 위에 쌓은 기나긴 여운을 사랑합니다.

항간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단 채, 현상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글들이 넘쳐 납니다. 언젠가 TV에도 얼굴을 비추었던 한 심리학자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극적인 제목을 단 그 책은 분명 심리학 서적이라고 소개되었지만, 내용은 온통 저자의 추측으로만 가득했습니다.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철저한 연역적 추론도, 최소한의 귀납적 연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내 경험에는”으로 시작해 “내 생각에는”으로 끝나는 글에서는 아무런 흥미를 얻지 못합니다. 대체 언제 타당한 연구 결과를 소개해줄지 책장을 스치듯 넘길 뿐입니다.

저는 고작 100년을 살지 못하는 한 인간이 천 년의 지혜를 뛰어 넘어 새로운 통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학은 그저 부단히 거인의 등을 타고 올라가 그의 어깨에 먼지라도 한 줌 얹을 노력을 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글들에게서 배어나오는 태도이며, 제가 쓰고자 하는 글의 방향입니다. 제가 다소 고지식한 과학적 편견에 갖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취향 좀 존중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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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prince님 안녕하세요. 아리 입니다. @wonderina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뜬구름 잡는 추측성 글을 꺼리시는군요 :)

일명 뇌피셜이라고 하죠ㅎㅎㅎㅎ 읽는게 시간 낭비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꺼려합니다.

아하.... 바로 이해가 되네요

제 주변에 정말 엄청난 뇌피셜리스트가 있었는데 상대하기 피곤해서 피했습니다ㅋㅋㅋㅋ

서점 매대 위에 뇌피셜 책들이 종종 베스트셀러로 올라와 있는걸 봅니다. 뇌피셜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관심 분야는 다르더라도 모두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문학에서조차,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은 저자들의 인간과 시대에 대한 분석능력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거인의 어깨'에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든 생각인데, 인문학 쪽에서는 역사가 별개의 학문으로 좀 뒤늦게 인정받았죠, 인문사회적 팩트를 찾는 가장 유용한 도구인데도. 그 자체로 무시를 받았다기보단 극소수의 식자층의 존재가 확실했던 시대에는 그냥 "있던 사실들"을 아는 것이 무슨 학문이냐...는 태도에서 그랬던 거고요. 그러나 그후로는 철학이건 문학이건 역사적 연구 없이는 제대로 설득력 있는 성과를 내기가 힘들게 되었죠. 소위 문과라고 해서 ( 사실들의 표현 방법은 다를 수 있겠지만) 객관성이 느슨해도 좋다는 인상이나 자기만족적 분위기가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사실 남의 분야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소위 인문학이랍시고 다 틀린 사실관계에서 본인이 내고 싶은 결론을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꼴을 보면, '학'이라는 글자가 왜 붙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인문학이 만만해 보이는 것일까요?

그리고 글쓴이 스스로는 논리적인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대는 근거가 출처도 없고 죄다 어디서 줏어 들은 티가 나는 글들도 많습니다. 기본적인 성의가 없어요. 물론 모두에게 열과 성을 다한 글을 쓰라는 말은 아닙니다. 글에는 장르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최소한 의견을 내고 싶으면, 과거에 관련된 논의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알아보고, 나는 어디에 동조하며 추가 의견이 무엇이 있는지를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대중 대상으로 출간한 책이 있는 사람들이 더 심한 경우가 많고, TV 같은 데 나오거나 하면 더 최악인 경우가 많아요. 괜찮은 연구하신 분들은 조용한 경우가 많죠. ㅎㅎ

요즘 일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이 좋은 시리즈를 놓치고 있었네요 ㅜ

본업이 바빠지면 스팀잇에 소홀해지는 것은 어쩔수 없나봅니다ㅠ

구글스칼라에 접속할때마다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는" 아이작 뉴턴의 말을 읽으며 감탄하곤 합니다. '어쩜 저리 멋진 말을 했을까, 역시 뉴턴이다' 라고 생각하면서요 ㅎㅎ 전 너무나 손쉽게 거인들 어깨에 올라갈 수 있으니 '무임승차자' 같은 기분도 살짝 느끼면서 동시에 감사함도 느낍니다 ^^;

여러분! 취향 좀 존중해 주시죠!

그런데 혹시 누가 sleeprince 님께 뭐라고 했나요?! ㅠㅠ 마지막 문장에서 감정이 느껴지는듯해요..

아니 @mylifeinseoul 님, 감정 천재이십니까? 누가 저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는 글들을 계속 보다 보니 짜증이 나서 쓴 글입니다ㅎㅎㅎ

참고로,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서서"라는 비유는 뉴튼이 가장 먼저 한 말이 아닙니다. 원래 유명했던 말인데, 그보다 더 유명했던 뉴튼이 그 말을 하게 되면서 마치 뉴튼이 만든 말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앗, 감정천재라니... ㅎㅎ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쓰신걸로 생각했는데, 유독 마지막 단락에서 점점 감정이 고조되는걸로 느껴졌어요 ^^; 그래서 혹시나 기분나쁜 일이 있으셨나 걱정되서 남긴 댓글이었습니다 :)

구글스칼라에서는 뉴튼이 말한걸로 써져있던데, 아니었나봐요 ! 이래서 인용은 함부로 할 게 아닌가봅니다.

뉴튼이 말해서 더 유명해졌으니, 어느정도 인정되는 것 같네요ㅎㅎ 사실 그래서 이번 글의 대문 이미지에도 뉴튼을 집어 넣었고, 여기서 연상하여 뉴튼을 비롯한 물리학의 4대 성인들을 분위기있게 모셔봤습니다.

너무 짜증내지는 마세요.
모든 글을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짜증나는 글을 보지 마세요^^

아니, 어떤×가 님의 최향갖고 깝니까?

다 개성이죠.

사실 제가 까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ㅋㅋㅋ 너무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는 글들이 많아서요. 오늘 우연히 계속 그런 글들만 보다가 짜증이나서 키보드를 들었습니다.

속이 시원해지는 글이라 리스팀을 안 할 수가 없네요. 반지성주의라고 할까요? 뇌피셜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쉽게 갈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느냐는 글들을 가끔 봅니다. 진짜 학식을 자랑하고 싶어서 어려운 책을 인용하고 함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죠. 결론이랍시고 요약 한 줄 찍 쓴 것보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자신이 아는 바를 쉬운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 때문에 내용이 쉬워져서는 안되는데 말입니다. 리스팀 감사합니다!!

제 글쓰기의 습관인 '것 같다.', '생각된다.', 짐작에는' 등속이 부끄러워집니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공부가 싫은 핑계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가 독자가 많은 글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인 것도 같네요.

제겐 쉽지 않아 보이긴 합니다.

지나친 겸양의 말씀이십니다.

오늘의 마지막 풀보팅 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수 천년간 쉼없이 자란 거인의 키

최소한의 귀납적 연구로는 부족합니다.
연역적 추론이 없는 것은 학문이 아니죠

@sleeprince님 취향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일종의 evidence-based writing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퍼런스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종종 "게르마늄 팔찌"에 대한 효능을 강조하거나, 아주 예전에 광고로도 나왔던 "육각수"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한편, 증거와 자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추론을 전개하다보면, 종종 암흑과 같은 세계를 맞이하게되는 때가 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거인의 어깨에 서더라도, 거인의 시선 너머를 보기 위해서는 일종의 해석과 확신 같은 것이 필요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또한 이러한 증거들을 과연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의 직관과 분석 사이에서, 증거로 쌓아올려진 것들을 어디까지 의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종종 맞닥뜨리곤 합니다.
Cluster failure: Why fMRI inferences for spatial extent have inflated false-positive rates 같은 논문을 살펴보면 (결국 저도 레퍼런스를 달게 되는군요.) 종종 우리가 쌓아올린 지식들에 대한 불확실성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물론, @sleeprince 님의 취향에는 저도 동의하는 편입니다. :)

맞습니다. 선행 연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글이 오로지 레퍼런스들의 모음집이라면, 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qrwerq님 짧은 글에도 굉장한 식견을 보여주시고 가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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