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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5-3) : 이기와 이타의 경계 ; 동전의 양면

in #kr7 years ago (edited)

잠자는 왕자님께서 잠못들고 이글을 쓰셨다고 생각하니 히히 정성스럽게 댓글을 달아야 할것 같습니다. 아래목차도 몇번이고 수정해서 만들었을꺼라 짐작하고 나중에 소스코드 슬쩍 써야겄습니다. 며칠동안 PEN 공모전 글 모두 보느라고 왕자님의 글을 스킵해뒀다가 지금 가져갑니다. 보파 회복이 어느정도 되고 제일 먼저 풀봇 날렸지요. 물론 다른 고래님들만큼이야 못하지만. ㅋㅋ.


우선 왕자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왕자님의 견해에 반박하는 건 아니고요. 글을 읽으면서 불교에서보는 몇가지 생각을 제가 이해한 부분을 정리합니다.

이타주의, 이기주의 등 ~주의를 불교에서는 제거해야할 사견(邪見)으로 보지요. 즉, 제거해야할 대상이지요. 왜냐하면 사견이라는 것은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든요. 이 사견때문에 모든 번뇌 나아가서 전쟁이든 분란들이 조장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견(正見)은 무엇이냐하면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거지요.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때문에 괴로움을 초래할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고착화된 실체가 없다(무아)라는 것이지요. 이 삼법인을 벗어난 견해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증거가 있다면 찾아보라고 오히려 따지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논사들이 논쟁을 하다가 많이들 과열되어 대론자들로부터 죽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학회에서 니잘났다 나잘났다 자랑질하다가 감정싸움이 격해져서 교수끼리 으르렁대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이성에 대하여서는 불교인식론에서 이렇게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인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1)현량(現量/직관), 2) 비량(比量/언어가 개입)이라고 보고 비량을 넘어서 현량에 다가가게 되면 삼법인을 체득(직접 체험하여 얻게됨)하여 증지(證知)를 얻는다는 것이지요. 즉 비량은 언어가 개입되는데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분리하는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사견도 바로 이 비량이란 놈때문에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량을 통해서 사유를 발전시켜서 현량(직관)까지가고 나중에 증지를 이룬다고 합니다. 수행을 통해서요. 그 수행이라는 것이 위빳사나인데 正念, 즉 바른 알아차림이라는 거지요. 사실 감정도 어찌보면 비량에 속하겠지요. 비량을 통해서 아는 것이니까요. 단지 감정은 느낌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식의 밑바탕은 바로 안다는 것자체이니까 결국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인식하는 존재의 밑바탕에는 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앎이라는 것이 아주 깨끗하고 맑은 앎, 즉 청정심(淸淨心)이라하고 이를 불성(佛性)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량을 통해서 바른 생각(사유/비량)을 하여 청정심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즉, 이타주의이든 이기주의이든 종교든 어떤 주의가 개입되어 어떤 사고의 틀을 형성한 것은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속에서 계속 답습되어온 문화때문이지요. 이를 습기(習氣)라고 부르는데 이를 제거하는 툴이 바로 삼법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법인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성(비량)을 통해서 사유함에서 시작할수 밖에 없지요. 이점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가치판단을 할수 있는 이성속의 그 무언가가 인간의 뇌속에 프로그램되어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유물론이나 유심론이아닌 둘다론이지요.)정도로 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의 고갱이가 소속된 문화의 영향을 받기때문에 이렇게 비윤리적 학살 뭐 그런것들이 생기는 것같습니다. 즉 타파해야할 사견이겠지요.


자비심 즉 선에 관하여서는 윤회론이 개입되는 것 같습니다. 즉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지요. 나쁜일을 하면 반드시 그대로 받는다는 것이 윤회론이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암만 나쁜일을 하더라도 잘먹고 잘산다면 타자가 볼때 이건 억울하겠지만 이생이 아니더라도 다음생에서 반드시 우주의 응징을 받는다는 거지요. 그렇기때문에 선/자비심을 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리심을 발하여서 중생구제를 한다는 대승사상이 엄청 커보입니다. 내가 지옥에 가서 대신 벌을 받더라도 지옥중생을 한 사람이라도 구제하기 전까지는 해탈도 마다하겠다는 그러한 무시무시한 미륵의 보리심은 어찌보면 윤회론에 근거한 믿음이라고 볼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여기에 희생이라는 미덕도 추가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해야 한다당위성으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사견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지요.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한다는 것은 바로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어리석음으로 경계하거든요. 이는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청정심/불성이란 자비심/선한 마음이 바탕으로 깔릴수밖에 없다는 논리거든요. 즉 자비심과 지혜를 내재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쁜짓하면 우주가 알아서 나중에 벌주니까 말이지요. 그렇다고 벌주니까 착한일해야한다는 그런게 아니고 알아서 착한일을 하게된다는 거지요. 여기서 알아서라는 것이 바로 의식수준/차원인거 같은데 인간과 동물을 구분지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도 됩니다. 물론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 아주 많지만요. 그래도 그러한 개차반 인간말종의 밑바탕에 이런 이란 그 무언가가 인간의 뇌속에 잠재해 있는거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정리 하고자하는 바는 잠자는왕자님께 따지는게 아니고 저 혼자 요기 멋진 포스팅 밑에 댓글을 달아서 나중에 저의 사유 흔적을 다시 밟아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리스팀도 하고요. 그니까 혹시라도 불쾌한 감정이 없으셨으면 합니다. 제맘알죠?

ps. 프린스가 이쁜여자랑 옴팡지게 키스하는게 부럽지 않아요? 저는 옛날에 이거 보면서 저런여자랑 자고싶다는 생각 많이 했습니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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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러운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불쾌할까 걱정하시다뇨. @peterchung님의 글이 반박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생각의 차이를 보는 것도 또한 재미 아니겠습니까. 심도있는 대화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peterchung 님 덕에 불교 사상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peterchung님의 글에서 약간이나마 이해한 바에 따르면, 불교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생명에 대한 희망이 더 큰 듯 합니다. 저는 인간이 진화의 산물로서 가지게 된 마음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불교 사상은 이를 극복하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 성질을 알고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불교는 이 사견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제가 가진 전(前) 공무원/ 현(現) 공돌이의 시각에서는, 해탈의 경지가 진짜로 존재한다하더라도 이는 지나치게 가우시안 그래프의 극단에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각과 보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에는 불교의 수행이 너무 가혹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한가지 재미난 상상을 합니다.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에서 '천상의 피조물' 에피소드를 보면, AI로봇이 출가하여 부처가 됩니다. 절의 사람들은 이 로봇의 깨달음을 우러릅니다. 만약, 정말 불교의 가르침대로, 사견들을 제거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이라면, AI 로봇이야말로 가장 쉽게 불교적 깨달음과 해달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첨언하자면, "이타주의든 이기주의든 어떤 주의라는 것은 그동안 답습되어 온 문화 때문이다"라는 견해도, 저의 생각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본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침팬지 집단마다 고유의 문화가 있고, 인간이 어떤 문화를 퍼뜨리면 집단의 문화가 변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본성을 넘어서는 문화를 가르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팬지에게서 보이는 이타주의나 이기주의가 문화의 영향보다는 본능의 영향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이 문화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인간을 홀로 살게 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정신병에 걸려 버리고 말것입니다. 모든 문화는 본능이라는 토양 위에 싹틀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문화가 가진 힘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글에서도 언급하였듯, 감정의 환경으로서 우리는 문화를 길러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에서 꾸준히 학습하고 발전하여 과거와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보이는 생각의 차이는, 본능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1. 키드키득, 가우시안 그래프의 극단, 표현이 넘 좋아요. 백퍼공감!
  2. 인류멸망보고서는 꼭 봐야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님 법문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AI에게 삼법인을 프로그램화 해놓으면 아주 좋을것같다고요. 그런데 이 영화가 딱 그거 같습니다. 불교 용어중에 평정(捨) 상태가 있는데 이게 바로 우리같이 감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AI의 기본 속성인것 같습니다. 담백한 것이지요. 선과 악을 똑같이 보는 것. 아주 중립적인 거지요. 하지만 맹탕하고는 다르지요. 좀 나아간 생각인데요. 불교적 시각에서는 AI를 생명체로도 볼수 있을거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생명체란 識(식: 아는마음)불연속의 연속으로 보거든요. AI가 보는 마음/즉 아는 마음이 발생한다면 결국은 유정중생으로도 볼수 있지요.(유정중생에 대한 이야기는 밑에 글에 있습니다.) 이 시각은 제 견해일뿐, 그러나 이를 좀더 전문적으로 파고들면 '아뢰야식' 혹은 '바왕가'라고 불리는 생명지속식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인간이 출생하는 과정을 서술한 경전도 있습니다. 아주 치밀해요. 사람이 죽는 과정과 태어나는 과정, 그리고 죽음과 태어남의 사이에서 생명지속심이 경험하는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요. 읽다보면 확인해보고 싶지요. 그런데 그놈의 가우시안의 한가운데에 있는 종자이다보니 그걸 볼수 없어서 문제이지요. 그런데 좀더 생각해보면 AI가 아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AI의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AI가 창조된 것은 인간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을 가진 어떤 존재가 생성되는 시대적 계기가 되어서 출현(합생)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즉, 불교식으로 표현하지면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하지요. 원인과 조건에 따라서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AI가 생기게하는 원인이긴 하지만 절대 원인은 아니고 수많은 원인중의 하나이겠지요. 즉 개연성의 파동이 현실화되어서 창발? 그래서 AI가 출현된 거지요.
  3. 생각의 차이는, 본능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둘다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한쪽만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둘다 긍정이지요. 복합적이겠지요. 그런데 불교에서 보는 시각에서는 그 본능이라는 것이 왜있을까?라는 물음표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즉, 본능이라는 것이 결국은 '나'라는 집착심에서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이라는 것이지요. 즉 그 어리석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진화가 일어난다는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사실 인간과 동물에 대해 구분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세간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 기세간에서도 욕계, 색계, 무색계 그리고 기세간을 뛰어넘은 출세간, 이렇게 나누거든요. 그중에 인간과 동물은 욕계의 구조에서 축생과 인간계로 따로 분리시켜 설명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것도 퉁쳐서 유정(有情)중생이라고 표현하지요. 즉 감정을 가진 중생이란 표현인데, 곰곰히 생각하자면 본능이라고도 볼수 있지요. 출세간이 아닌이상 기세간의 중생들은 모두 무명(어리석음)때문에 윤회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유익한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AI에 대한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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