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에세이] 나는 왜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를 싫어하는가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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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포르노


나는 어느 사진 기자의 고백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사진사는 과거 아프리카의 한 지역이 가진 이국적인 전통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를 세계에 소개했다. 그가 카메라에 담은 아프리카 부족민의 헐벗은 모습은 큰 인기를 끌었다. 마치 문명을 거부하는 듯한 그들의 이미지는 신비감과 연민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끌어냈다. 그리고 다큐 속의 현재에서, 사진사가 담아냈던 야만의 이미지는 더이상 부족민의 삶을 대변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더이상 헐벗지 않았고,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찍힌 그 이미지는 여전히 세계인들의 마음 속에 부족민의 삶을 대표하고 있었다. 많은 다큐멘터리 제작사와 사진 기자들이 야만과 빈곤을 취재하기 위해 부족을 방문했다. 부족민들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아침이면 면티를 벗고 전통 장신구를 착용한 채 몸에 그림을 한가득 그렸다. 관광지가 된 마을에서는 흥정이 이루어졌다. 면티와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 신발을 신은 부족의 남성은 사진 기자에게 사진 한 매당 얼마씩인지 가격을 제시했다. 이곳에서 제작된 사진과 영상은 다시 세계로 팔려 나갔다. 꾸며진 야만과 거짓된 빈곤은 하나의 산업이 되어 있었다. 사진 기자는 한 부족의 삶을 한정지어 버린 자신의 사진을 후회했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라 일컬어지는 창작물들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연민을 먹고 자란다. 몇몇 NGO단체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구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가난을 판매한다. 이기심만큼이나 강한 연민의 감정은 그들의 사업을 번창시켜주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를 본 창작자들은 모순되는 어휘들 사이에서 가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엄밀히 말해 대중의 연민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연민을 끌어모을 초점으로서 가난과 빈곤의 진부한 주제를 벗어나, 신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까지 창작물 안에 담아낸다. 그들은 빈곤 포르노라는 작는 명칭을 넘어 곤궁 포르노라는 이름이 더 걸맞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내고 있다.

객체가 된 빈곤


물론 이것이 누군가를 돕기 위한 거짓이라면, 나는 그 선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 내용이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부분적으로나마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빈곤 포르노라는 방법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그것의 감상을 꺼리는 감정이 일어남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 이전에, 깍아져 내려가는 그들의 인간성과 그들이 느낄 모멸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과연 나라면 나의 가장 비참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을까. 삶을 위해 나의 인격까지 팔아야 한다는 치욕감은 그의 가슴에 얼마나 상처를 남기고 있을까. 혹자는 내가 배부른 나라에 태어나 ‘무엇이 더 중요한지’ 모르는 샌님인 탓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창작자들 역시 배부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임은 매한가지이다. 나에게는 그들의 행위가 자신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타인에게 종용하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창작자들은 왜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으로서 자신의 것을 팔아 베풀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것을 팔아 분배하는가. 내 기분에서 그들의 활동은 상업적 중개인의 지위에 불과하고, 잘해야 동업자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빈곤 포르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오만한 감정에서 오는 죄책감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가 마주한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고자 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이러한 내 감정의 반응은 영화「아이 엠 샘」「7번 방의 선물」을 보고 느낀 감상으로 비교하자면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두 영화는 유사한 소재와 유사한 인물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을 대하고 묘사하는 태도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아이 엠 샘」에서 숀 펜이 연기한 샘 도슨은 매우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샘은 비틀즈 음악을 좋아하고 자주 만나는 이웃 친구들이 있다. 영화는 우리가 샘이라는 인물을 알아가고 공감할 수 있도록 길을 놓아 간다. 반면에 「7번 방의 선물」에서 류승룡이 연기한 이용구는 철저하게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감동을 위한 부성애만이 강조되고, 그의 부족한 지능은 희화화 된다. 영화는 이용구를 최대한 불쌍하게 만들어 우리의 눈물을 쥐어 짤 준비를 해 나간다. 나는 전자의 영화에서 샘이라는 한 명의 인간이 기억에 남았지만, 후자에서는 낮잡아진 바보의 전형만이 기억에 남았다. 샘 도슨에게 느낀 나의 연민이 내 이웃에게 또는 내 친구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면, 이용구에게 느낀 연민은 열등한 존재에게 내리는 하사품이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영화를 본 나는 나에게서 느껴지는 오만한 감정에 죄책감을 느낀다. 어떻게 감히 누가 누구를 함부로 불쌍히 여길 수 있을까. 나는 같은 이유에서 인간을 제거하고 곤궁만을 남긴 빈곤 포르노가 결코 달갑지 않다.

누군가는 내가 수요자인 일반 대중을 함께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느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을 동정하는 대중을 비판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나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재는 편협한 마음을 가지지 않은 착한 사람들이다. 나는 단지 이렇게 착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먹는 거짓된 장사치들을 비난할 뿐이며, 설사 선의의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내 뒤틀린 심성이 이를 선호하지 않음을 밝힐 뿐이다.

주체가 된 빈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큰 딜레마를 겪는다. 나는 차마 빈곤 포르노의 주체가 되어버린 사회적 약자들을 비판하지 못한다. 곤궁에 처한 당사자가 자존심을 꺾고 도움을 청하는 마당에, 어떻게 “당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다뤄서는 안돼”라는 오지랖을 부리거나 “당신 그정도로 힘든 것은 아니잖아”라며 상대의 절박함을 깎아 내리는 오만을 부릴 수 있을까. 다소 과장과 거짓이 섞여 있다 한들 이는 그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자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를 통해 그저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창작물이 못내 불편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비판할 수가 없다.

물론 모든 것이 거짓인 사기꾼도 있을 터이다. 작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살인마 이영학은 오랫동안 어금니 아빠라는 빈곤 포르노의 주체가 되어 후원금을 모았다. 사람들은 그의 끔찍하고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영학 같은 악질의 범죄자를 다른 주체들과 함께 엮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타인의 선의를 비웃듯이 쉽게 이용하고, 감히 약자의 틀을 내세워 방패막이 할 수 있는 악마적 인격의 소유자는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례로 나머지 사람들을 통째로 묶어 매도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빈곤 포르노의 창작자에게 들이밀던 비판의 칼날이 겨눌 곳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빈곤 포르노라는 창작물을 여전히 싫어함에도, 창작자를 비판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는 나에게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오만함에 느낄 죄책감이냐’ 혹은 ‘절박한 사람을 헐뜯어 느낄 죄책감이냐’를 선택하게 만드는 감정적 함정과도 같다. 마땅히 이 진퇴양난의 상황은 순수하게 타인을 안타까워할 수 없는 나의 비뚤어진 마음 탓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덫에 빠진 것이 억울하여 스스로를 달랠 핑계로서, 이 사회에 책임을 일부 돌려본다. 멍청하게 덫에 걸어들간 것은 나이지마는 그 덫을 놓은 것은 사회가 아닌가하고 말이다. 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동사무소로 발걸음을 향하지 않고, 자신을 광고하게 되었는가하고 말이다. 사회가 그들을 바르게 지원했더라면 빈곤 포르노의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을 터였다. 이 사회는 빈곤 포르노의 제작 환경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반성해야 한다. 나는 마침내 후자의 죄책감을 털어 내고, 내 못된 심보가 빈곤 포르노의 제작자를 마음 놓고 비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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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에 처한 당사자가 자존심을 꺾고 도움을 청하는 마당에, 어떻게 “당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다뤄서는 안돼”라는 오지랖을 부리거나

많이 공감해요. 저도 후원금 모집을 위한 방송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당사자들의 절박한 삶의 단편이 불특정 다수에겐 그저 잠깐의 값싼 동정과 연민으로 소비되는게 너무 불편한데, 한편으론 그래서 내가 그 값싼 연민과 동정을 소비하는 것 말고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그리고 방송에 나오지 않는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나를 생각하면.. 결국은 ARS라는 아주 편리한 방식으로 어쨌든 그들에게 몇천원(중 일부겠지만요)이라도 보태주는 것이, 불편하다며 이런 저런 잣대를 들이미는 것보단 차라리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홍보해

맞습니다. 저도 이래저래 어휘를 동원해 썼지만, 불편한 감정끼리 부딪히는 딜레마 사이에서 결국은 돕는것이 최선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The lump님 글을 보고 들어와 읽습니다. 단순히 지나치기 쉬운 주제를, 어려울 수 있는 어떤 지점을 본인만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풀어나가시는 글이 감동적입니다. 사회적으로 더 논의가 되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홍보해

감사합니다. 제가 소비자 입장에서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썼다면, @thelump님은 생산자 입장에서 작품을 생산하며 느끼는 감정을 풀어내서 글을 접하시는 분들에게 균형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고민없이 나온 창작물과 악의적인 창작물을 보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thelump님의 글을 보니 좀 죄송스러웠습니다.

"사회의 책임"이라는 말에 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말씀하신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반사회적 인간을 어떻게 사회적 인간으로
변화시킬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실제 많은 거지들과 노숙자들이 사회에 소속되지 못하는 것과
많은 궁핍한 나라들이 세계에 소속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조금은 닮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나라 내에서는 그래도 조금씩은 진보할 수 있는데
국가 단위에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너무 어려운 주제를 던져 주셨네요...

사실 이 글 자체도 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부터 생각한 소재였는데, 혹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심지어 친한 동생을 붙잡고 이 주제로 토론도 한번 해보았습니다. 혹시 제 생각이 어딘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전혀 잘못된것 아닙니다.
아주 올바른 훌륭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계시다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저와 생각이 비슷하시기 때문에 ㅋㅋ

훌륭하십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요호님이랑 sleeprince 님 쵝오 +_+

공감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빈곤 포르노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포르노의 문제점은.. 찍힌 이와 보는 이를 분리해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불쌍하다.' 라는 감정만 남게 만드는 모든 작품은, 나쁜 작품입니다.

오오 제가 찾던 문장을 @thelump 님이 써 주셨군요!! 옳습니다. 찍힌 이와 보는 이를 분리해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리죠! 저는 인간 대 인간으로 공감할 수 있는 착한 작품을 좋아합니다!

sleeprince 님과 마찬가지로, 제 머릿속에만 맴돌던 그 문장을 오쟁님이 말씀해주셨어요 ! 적어주신 것처럼 단일 감정만이 유일한 답인 것처럼 유도하는 작품은 나쁘네요.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유니세프라던가 세이브 더 칠드런 같은 후원광고를 접할 때마다 불쌍한 마음 한 켠에 드는 불편함... 그래서 죄책감 같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들곤 하지요. 약자의 빈곤을 이용해 장사하는 사람들은 죄책감도 모르나 봅니다.

정말 악질적인 인간 말종입니다. 우리가 가진 최악의 어휘들을 모두 수사로 사용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지옥으로 가는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제가 늘 품고있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것뿐이겠습니까? 어차피 살아간다는것은 폭력과 희생위에서 걸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먹기위해서 다른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그놈의 맛을 위해서 온갖 가학적행태를 일삼지요. 그렇지만 마트 혹은 음식점에서 아무 상관 없는 듯 분위기 잡고 고상하게 먹지요. 그냥 그 과정은 모르고요. 정확히 말하면 알면서도 무시하는거죠.

결론은 마음가짐의 선택문제겠죠. 좀더 덜 탐욕적/덜폭력적으로 살아가자.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들을 사회가 조금씩 고쳐나가서, 덜 탐욕적/덜 폭력적인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빈곤을 보는 제 눈과 마음에서 이는 생각과 감정이 오만하고 죄스러울때가 많네요. 수단이 과하고 노골적인데 그 뒤에 간절함이 덮어질까 염려가 되기도 하네요.
깊은 생각이 없었어서 더 민망하기도 하네요..

민망하긴요. 오나무님의 착한 심성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착하긴요, 단순한거예요. ㅠ.ㅠ (이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생각하던 부분이네요.
글을 몇번 적었다 몇번 지웠네요.
자극적인 소재에 목말라 있는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 식의 촬영과..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썩은줄임에도 잡고 싶은 그들이 자신의 불행함을 팔아 도움을 요청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서 보면..
도움 받지 못하였다는 기사를 볼때마다 씁슬해지기도 하고요..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덫... 잘 보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연민이 돈으로 바꾸어지는 세상이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isis-lee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이와 비슷한 자료를 볼 때마다 저 역시 양가감정이 일곤 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일전에 tv를 통해 나무에 옷을 걸어놓고 파는 아주머니에 대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제작진과 공무원이 다가가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극구 손사래를 쳤습니다. 좋은 말로 사양하다가 나중엔 화를 내시더군요.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요. 남의 선의(인지 호기심인지 모르겠지만)가 당사자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곤 포르노에 함유된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말씀대로 본인 사생활을 드러내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움의 손길을 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요.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촬영 혹은 취재의 대상자들과 터넣고 대화를 나누고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자료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의 책임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동의합니다.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이는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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