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1) : 들어가며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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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혹성탈출(원제 Planet of the Apes)』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Pierre Boulle)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꽤 좋아해서, 이 영화도 1968년 처음 개봉된 오리지널 혹성탈출부터 최근 리부트 시리즈까지 다 챙겨 보았다. 인류가 몰락하고 다른 유인원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다는 설정은 지금 봐도 충격적이고 참신한 상상이다.

그런데 『혹성탈출』에는 단 한 가지, 나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침팬지와 고릴라, 오랑우탄이 한 데 사회를 이루고 사는 모습이다. 1968년 영화에는 정치인이나 과학자의 모습을 한 침팬지와 군인 고릴라가 등장하고, 최근의 영화에는 함께 연합하여 인간에게 대항하는 세 종이 등장한다. 요즘에는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듯, 침팬지는 유전적으로 사람과 제일 가깝고, 고릴라와 오랑우탄과는 굉장히 먼 거리에 있다. 아무리 그들에게 인간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쉽게 연대할 수 있는 유전적 거리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한 발 양보하여 설정을 받아들인다손 쳐도, 그 정도 수준의 사해동포주의를 갖고 있는 유인원들이 대체 왜 인간만은 짐승 취급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허구의 상상인데 무엇인들 가능하지 못하랴마는, 사람마다 각자가 허용하는 상상의 범위는 다르고, 나에게는 침팬지와 고릴라, 오랑우탄이 연합하여 싸우는 광경이 너무 어색해서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원작이 계통분류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나온 탓이야”라고 되뇌며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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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에는 인간 이외의 유인원을 모두 원숭이로 취급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나는 이 인간 중심적 사고를 ‘종 예외주의’라 부르려 한다. 예외주의(Exceptionalism)란 어떠한 특정 인종, 국가, 개인, 사회, 기관이나 기간 등이 다른 것들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예외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일컫는다. 나는 특별하다는 인식은 곧 나에 대한 자부심인 동시에, 대상을 ‘나’‘나 이외의 것들’로 이분하고, 나 이외의 대상을 평가절하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주변 국가를 모두 오랑캐(夷)로 보았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외국인을 전부 야만인 바바로이(barbaroi)라 불렀다. 16세기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성을 갖고 있는지를 주제로 논쟁이 붙었으며, 불과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서구 세계는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의 원인을 자신들만의 특별한 창의성, 근면성, 유전적 우월성 등에서 찾으려 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 세계가 서구 밖을 ‘동양’으로 뭉뚱그리는 태도를 지적하며 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 『혹성탈출』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예외주의도 다르지 않다. 영화는, 인간 스스로의 몰락을 그린다는 점에서 인간의 오만함을 깨부수지만, ‘인간’과 ‘인간 외 유인원’으로 구분 짓는 이분법적 오만함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과연 인간은 ‘인간’과 ‘인간 외 유인원’으로 구분할 자격이 있을 만큼 특별한 존재인가.

현대의 인류는 이제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이 모두 다른 종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자신을 관찰자로서 저들과 떼어 놓고 생각하는 버릇 탓에, 유인원 종 사이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한때 ‘피그미 침팬지’로 불렸던 ‘보노보’는 침팬지와 별개의 종이며, 침팬지는 다시 네 개의 아종(subspecies)로 구분되고, 고릴라는 두 개의 종과 네 개의 아종으로 구분된다. 또한 오랑우탄은 별개의 두 종으로 구분되며, 최근 Nater, A. et al.(2017)은 새로운 오랑우탄 종을 구분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조차 “침팬지가 거기서 거기고, 고릴라가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침팬지나 고릴라의 한 아종이 갖는 유전적 다양성이 인류 70억 인구의 유전적 다양성을 뛰어 넘는다. 한 종(species)이 아니라 한 아종(subspecies)이 갖는 유전적 다양성이다. 오히려 유인원들 눈에는 인간이 거기서 거기인 셈이다.

따라서 나는 먼저 인간과 유인원 종을 분류하여 각자가 얼마나 유전적으로 다른지를 밝히고, 이후 유인원과 인간의 행태를 비교함으로써, 인간의 ‘종 예외주의’가 부당한 까닭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2) : 종의 분화로 이어집니다.


참고 문헌

[1] Begue, L. (2013).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이세진 (번역). 서울 : (주)부키. (원전은 2010에 출판)

[2] Burgess, R., Yang, Z. (2008). Estimation of Hominoid Ancestral Population Sizes under Bayesian Coalescent Models Incorporating Mutation Rate Variation and Sequencing Errors. Molecular Biology and Evolution, 25(9), 1979–1994.

[3] Dawkins, R. (2006). 이기적 유전자(30주년 기념판). 홍영남 (번역). 서울 : 을유문화사 (원전은 2006에 출판)

[4] de Waal, F. (2005). 내 안의 유인원. 이충호 (번역). 경기도 파주 : 김영사 (원전은 2005년에 출판)

[5] Diamond, J. (1996). 제3의 침팬지. 김정흠 (번역). 서울 : 문학사상사 (원전은 1993에 출판)

[6] Diamond, J. (2013). 총, 균, 쇠(개정). 김진준 (번역). 서울 : 문학사상사 (원전은 2003에 출판)

[7] Doker, J.(2012).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신예경 (번역). 경기도 파주 : (주)알마. (원전은 2008에 출판)

[8] Locke, D., Hillier, L., Warren, W., Worley, K., Nazareth, L., Muzny, D., [...] Wilson, R. (2011). Comparative and demographic analysis of orang-utan genomes. Nature, 469, 529-533. doi:10.1038/nature09687

[9] Nater, A., Mattle-Greminger, M., Nurcahyo, A., Nowak, M., Manuel, M., Desai, T. [...] Kru¨tzen, M. (2017). Morphometric, Behavioral, and Genomic Evidence for a New Orangutan Species. Current Biology, 27(22), 3487 - 3498.

[10] Prado-Martinez, J., Sudmant, P., Kidd, J., Li, H., Kelley, J., Lorente-Galdos, B. [...] Marques-Bonet, T. (2013). Great ape genetic diversity and population history. Nature, 499, 471–475. doi:10.1038/nature12228

[11] Williams, J. M., Lonsdorf, E. V., Wilson, M. L., Schumacher-Stankey, J., Goodall, J. And Pusey, A. E. (2008). Causes of Death in the Kasekela Chimpanzees of Gombe National Park, Tanzania. American Journal of Primatology, 70, 766–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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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론 유인원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외 동물이죠. 외계지성체가 등장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ㅎㅎㅎㅎ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런 동물이죠ㅎㅎㅎㅎ 너무 주제가 넓어져서 조금 좁히려고 유인원에 한정지어 봤습니다

이런 글 때문에 스티미언은 모름지기 스파가 두둑해야..ㅠㅠ 미력한 뉴비의 봇댓리 삼종세트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hermes-k 님 외람되지만, 혹시 리는 깜빡하신게 아니신지 여쭈어봅니다. 물론 안해주셔도 저는 이 정도의 관심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 같이 일천한 뉴비에게 리스팀은 단비와도 같아서 염치 무릅쓰고 댓글남겨봅니다.

어머나... 리스팀(busy는 리블로그) 버튼 눌렀는데... busy 연결장애 때문에 반영이 안된 거 같아요. 다시 누를게요. 말씀 잘 주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차라리 인간과 침팬치 vs 오랑우탄과 고릴라 연합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었을까요? 맘대로 상상해봅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계통을 설명하는 2부가 올라가겠지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오랑우탄도 고릴라랑 많이 멉니다ㅎㅎ 인간이 침팬지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표현해서 종종 사람만 진화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시간동안 침팬지도 진화해서 지금의 침팬지가 된것이지요. 즉 우리가 오랑우탄과 유전적으로 먼 것 만큼 고릴라도 오랑우탄과 유전적으로 거리가 멉니다.

세상에! 엄청난 레퍼런스의 글들이군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내용까지!
저도 영화 보면서 너무 답답했던 것이, 인간 대 나머지를 너무 이분법적으로 가른 뒤 인간은 악, 나머지는 선으로 정해놓고 가는 부분이 많이 아쉬웠어요.
글 잘 읽었어요~ 팔로우하고 가요~

감사합니다. 이번 시리즈는 저 레퍼런스만큼 길어질 것같아서 도입부에서 일단 끊었습니다ㅎㅎㅎ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종(인간) 예외주의의 부당함을 어떤 관점에서 다양하게 풀어낼 지 기대되는군요.
이번 도입부 말고 또 어떤 관점이 있을지, 과연 그 관점들이 어떤 실용적, 학문적 가치를 지닐지 궁금하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실용적, 학문적 가치를 갖는 글을 적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학술적 가치를 가진 글들을 참고해 제 생각을 덧대는 수준일 것입니다ㅎㅎ

댓글을 읽다가 잠시 떠오른 생각인데 예전에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는 진화론을 받아들일수 없다는 소리를 하던 친구가 기억나네요.

원숭이는 인간의 조상이 아니고 먼 친척인뿐이라고,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은거지 원숭이가 우리 조상은 아니라해도 전혀 들을려고 하지 않더군요.

맨 처음에 스팀잇에 와서 쓴 글이 양자역학, 경제학, 그리고 진화론 (1)이었는데, 말씀하신것과 비슷한 주제입니다. 뭐 본인이 안받아들이는거야 자유지만, 그게 학계의 정설인건 정설인건데 말입니다.

진화론을 가지고, '원숭이가 우리 조상이란 말이냐!' 식의 반박을 듣게되면 숨이 턱 막힙니다. 그들의 조상과 우리의 조상이 같다는 말이지, 지금의 그들이 우리의 조상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ㅎㅎㅎㅎ 충렬공파 35대손이 다른 35대손과 항렬이 같은 것이지, 둘이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는건 아닌데 말입니다.

제발 공부좀 하고 이야기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나, 속마음을 이야기했다간 한 대 맞기 딱 좋습니다. ㅜ

이 영화 시리즈 중에서 유일하게 본게...진짜 원제가 혹성탈출인 71년작인가?그랬네요. 그 영화 감독을 배우로 참 좋아하는데 연기 때려치고 만든 영화가 대체 뭔지 보려고...오래돼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거기서는 침팬지가 고릴라에 의해 살해되어서 사건이 시작되었던 것 같네요ㅋ

저는 68년도에 나왔던 시리즈의 첫 작품을 봤었는데, 검색해보니 71년도 작이 세 번째 작품이로군요.

잘읽었습니다~ 진짜대단하시네요

감사합니다!

@sleeprince님, 다음엔 어떤 글을 준비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다음에는 신경 과학글을 좀 번역할 생각입니다. 제 글은 이번에 생물 관련하여 썼으니, 다음에는 물리 관련된 글을 쓸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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