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에세이] 여러분이 가장 먼저 배운 제2언어는 무엇입니까?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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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시대

우리는 언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장이 국제화되면서 영어 뿐 아니라 제3외국어까지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기업들 또한 구직자들에게 언어 능력을 요구합니다. 이력서에 할 수 있는 언어를 적는 란이 따로 있습니다. 공대생들은 이 언어란에 C#, C++, JAVA, Python 등을 적고 싶은 마음이 굴뚝입니다. 벌써 영어를 제외하고도 네 개의 언어를 더 할 줄 아는 셈이니까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적으면 안되지? '외국어'라고 하지도 않았고, '언어'라고만 적혀 있는데?" 게다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른 언어의 정의는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입니다. 청자가 컴퓨터일 뿐, 프로그래밍 언어도 내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배운 제2언어는 무엇입니까?

만국의 공통어 수학

예상해 보건대,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배운 제2언어는 수학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입을 우물거리며 '어어..ㅁ..마!" 를 외친 이후부터 가,나,다 따위가 적힌 한글 카드와 1, 2, 3 따위가 적힌 숫자 카드들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엄마"를 먼저 배웠으니 한국어가 제1언어일 것이고, 수학의 기초 문자인 1, 2, 3 을 익히기 시작했으니 분명 수학은 여러분에게 제2언어가 됩니다. 누구도 1, 2, 3 전에 A, B, C 를 배우지는 않을 터입니다. 물론 '수학' 자체가 언어인 것은 아닙니다. 엄밀하게는 '수학 언어'라고 일컫는게 옳을 듯 합니다.

'수학 언어'는 수많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자로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 체계입니다. 보통의 언어는 문자가 음성 언어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음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언어가 익숙한 개념은 아니지만, 이것도 분명한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수화는 그 나라의 음성 언어와 대응되지 않고 독자적인 문법체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농인들은 음성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화는 음성과 결부되지 않고 오로지 손짓의 형태로 정보를 전달합니다. '수학 언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음성 언어와 결부되지 않고 문자로써 독자적으로 정보를 전달합니다.

문자 체계는 보통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로 분류되며, 표음문자는 다시 음절문자와 음소문자로 나뉩니다. 표음문자는 문자를 소리에만을 대응 시키고, 표의문자는 문자를 의미에 대응시킵니다. 표의문자도 읽는 법이 있지만, 어떻게 읽는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 음소문자는 한글을, 음절문자로는 히라가나를, 표의문자로는 한문을 들 수 있겠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세 나라가 서로 너무 다른 언어와 문자 체계를 가진 점은 참 흥미롭습니다.

음소문자
음절문자
표의문자
의미
(한글)
(히라가나)
(한문)
ㄱ +ㅏ→ 가
하늘
g, k + a → ga, ka
ka
tiān
나 + ㅏ→ 나
n + a → na
ki
de
다 +ㅏ→ 다
검다
d + a → da
ku
xuán
ㄹ +ㅏ→ 라
노랗다
r, l + a → ra, la
ke
huáng

위 문자 분류에 따르면, '수학 언어'는 표의문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天'을 한중일 각자가 '천', '티엔', '텐'으로 발음하지만 모두 '하늘'을 의미하 듯, 수학의 언어는 모든 나라에서 전부 다르게 읽히지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 집니다. 우리는 아래의 식을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읽지만, 영어에서는 "one plus one is two"라고 읽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나 영어를 하는 사람이나 동일한 정보를 전달 받을 수 있습니다.


수학 언어는 일상의 정보를 전달할 수 없지만, 수학적 정보를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합니다. 굳이 음성언어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바로 그 의미를 알 수 있고, 오히려 음성언어로 번역함이 의미를 훼손할 때가 많습니다.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어려운 영어 원서를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수학 언어 덕분입니다. 수식 한 두줄이 장황하게 적힌 영어 문장에 담긴 정보 대부분을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현재 아라비아 숫자와 그리스 문자, 그리고 각종 기호들로 구성된 수학언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공통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학이 어려운 이유

솔직하게 수학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높은 수준의 논리력과 문제해결의 창의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수학이 어려운 이유를 꼽아보자면, '수학 언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을 하려면 '수학 언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마치 프랑스어로 문학 작품을 쓰려면 프랑스어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학생들을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문제풀이를 이전에 '수학 언어'로 문제를 번역하거나, '수학 언어'로 된 문제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에 문제를 겪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수식이 문제에 주어졌다고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에 대해서 어떤 정보가 들어 오십니까? 저는 전공 탓에, 위 식을 보고 가 너비 2 짜리 삼각형 모양의 신호로서 t에 따라 x축의 오른쪽으로 진행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는 주기 2 짜리 사인 함수로 꼴로 나올 것이며 와 관련된 값으로 의 진폭이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문제를 내지도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여기서부터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반대로 학생들에게 너비 2짜리 삼각형 모양의 신호로서 t에 따라 x축 오른쪽으로 진행하는 함수를 적어보라고 하면, 더욱 어려워 합니다. '수학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학을 잘 하려면 '수학 언어'에 어느정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물론 수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 언어에 비유해 보자면, 문학 작품은 화려한 문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있는 철학과 내용 때문에 명작이 되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면서 집필을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학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언어 학습을 위한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문제가 대부분 객관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수학 언어'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은 하지만, 반대로 일반 언어로 된 문제를 '수학 언어'로 바꾸는 연습은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는 분명히 해보라고 되어 있는 증명문제를 푸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눈으로 나마 답지를 훑어보면 다행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영어 교육과 비슷합니다. 학생들은 영어를 10년을 배워도 읽을 줄만 알지, 말할 줄도 쓸 줄도 모릅니다. 언어를 배우려면 본인이 직접 입으로든 손으로든 말하고 적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수학 풀이 과정을 보면 두서가 없습니다. 등식을 세우지 않고 숫자와 문자만 연습장 여기 저기에 적습니다. 언어를 익히려면 먼저 전체 문장을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연습장 여기 저기에 단편적으로 적어 푸는 것은 단어 나열식으로 말하기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언어 학습의 가장 중요한 점은 꾸준함입니다. 이미 잘 아는 언어도 몇 개월 쓰지 않으면 어눌해 집니다. '수학 언어'도 마찬가지여서 꾸준함 없이는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수학도 통역이 되나요

[Appendix] 교양을 위한 양자역학 에서 저는 일상의 언어로 양자역학을 설명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수학 언어' 없이 물리학을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의미가 잘못 전달될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문학이나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번역본이 아닌 원전을 본다고 합니다. 언어가 달라졌을 때 의미가 온전히 전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도 그의 저서 '평행우주'에서 이점을 설명했었습니다. 그는 언어의 오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대중들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단순히 측정 기술의 한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철저히 수학적인 논리에 의해서 도출된 결론임에도 말입니다.

원래는 수학 언어도 여느 언어와 다를 바 없이 일상의 영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살이 찢겼을 때 난 피를 보고, 또 들판 핀 꽃을 보고 사람들이 "빨강"이라는 속성을 추상화하여 언어에 담은 것처럼, 사람들은 물체들 사이에서 1, 2, 3 과 같은 숫자의 속성을 추상화하여 언어로 만들었습니다. 더하기, 빼기 같은 사칙연산까지 얻어 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수학 언어를 이용해 한 수준 더 높은 개념을 추상화해 냈고, 또 그 개념은 다음 개념을 추상화해 나갔습니다. 더하기에서 곱하기를 얻고, 곱하기에서 거듭제곱을, 거듭제곱에서 다시 제곱근과 로그의 개념을 얻었습니다. 일상에 기반하지 않은 수학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멀어져 갔습니다. 서로 간의 통역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수학 언어는 일상 언어와 멀어지며 자신의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을 수학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인류는, 전공자가 아니라면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에 도달해 있습니다. 수학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과학 지식까지 인류를 이끌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국어 다음으로 배운 언어가 '수학 언어'이지 않습니까? 비록 '수학'을 잘 못하더라도, 인류를 발전시킨 '수학 언어'를 내가 조금은 안다고, 어디 몇 백만 광년 떨어진 행성에 살고 있을 미개한 외계인에게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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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요즘 말로 수포자에 가까웠던 고교 시절의 수학 은사가 생각나네요. 학원 선생님이셨는데 첫 시간에 '수학=기호논리학'이라고 칠판에 쓰는 걸로 수업을 시작하셨던... 이후 한 동안 수학 정석에 나오는 문제들을 수학 언어로 바꾸는 연습만 계속 시키셨는데 덕분에 1년도 채 안돼 가장 자신없었던 과목이 가장 자신있는 과목을 바뀌었죠. 대학 들어와서는 논리실증주의를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구요. 글의 가치에 드려 마땅한 봇/댓/팔/리 4종 세트 날려드립니다~^^

와.....감사합니다... 저도 과외하면서 학생들 가르칠 때, 이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일단 수학 언어가 되어야 진짜 수학문제를 풀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걸 잘 모르더라구요. 30년전 그 수학 은사님은 참 훌륭하신 분 같습니다.

대학원에서 박사를 하시면서 토폴로지를 전공하신 분이셨는데 지금쯤은 돌아가셨을지도... 제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은 분이셨는데 연락 한 번 제대로 못드렸네요. ㅜㅜ 슬립프린스님한테 수학을 배우는 학생들도 대단한 행운아들인 듯합니다.^^

리스팀하고 보팅하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수학 언어..정말 신선한 접근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숫자 언어를 객관식으로 푸는데, 주간식을 객관적인 수학 언어로 수립하는 것은 예전 세대들은 경험이 없어서 참 어렵지요.
근데 그걸 요즘 아이들이 배우는겁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지붕 밑에서 어렵다고 이미 인식하고 배우니 아이들이 쉬울리가 없죠.
오늘도 꼬맹이와 국어를 수학 언어로 푸는 시간을 갖고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너 정말 똑똑하다. 엄마때는 초등학교 4학년은 되야 이런거 했었을꺼야. " 아이는 엄마가 쩔쩔매는 걸 보고 마냥 신이 나지요.
수학은 언어였던 거예요. 우린 영어처럼 문법만 배웠네요. 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써보니 이런 장문의 댓글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능하시다면 앞으로도 댓글 또는 리스팀 많이 부탁드립니다!

수학도 하나의 만국공용어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군요.

그런 셈입니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포스팅이에요... ㅠㅠ 첫번째 부분은 정말 공감이 가요. 외국어가 아니라 언어라면 공학도들은 정말 쓸 언어가 많겠네요!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송하기는요ㅋㅋㅋ 누가 만든 말인지 문송하다는 말은 들을때마다 너무 웃기네요

첫번째 언어 바디랭기지 두번째 언어 한글^^
수학적 언어는 학생땐 싫었는데 요즘엔 관심이 가요

엇 인공적 언어라고 다시 정의해야겠네요ㅋㅋㅋ

^^죄송해요 그냥 생각이 나서

문학이나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번역본이 아닌 원전을 본다고 합니다. 언어가 달라졌을 때 의미가 온전히 전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경우(System 설계)는 헷갈리면 영어 원문을 봅니다. 한글이나 한문으로 번역한 문장을 보면 불 분명한 경우가 많아서요.

다른 언어를 번역하는것은 그 의미를 잘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것 같아요.

전공같은게 좀 그런면이 있는거 같습니다. 저도 학교에서 죄다 원서로 배워놔서, 누가 우리말로 된 문제를 가져오면 의미파악이 잘 안됩니다. 한자식 단어가 더 어려워요ㅎㅎㅎ 제 다음 글에서는 그런 문제 의식에서 언어의 종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수포자라는 말 아마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네요.ㅎ

포기하는 순간 끝입니다ㅠㅠ

부끄럽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인지라 뒷통수를 얻어맞은것 같네요..ㅎㅎ 코딩을 하면서도, 수학 문제를 풀면서도 전혀 생각을 않던 부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배우는 언어이자, 아마 가장 사용률이 높은 언어는 영어나 중국어, 스페인어 등등이 아닌 "수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ㅎㅎ 참신한 시각 잘 배우고 다녀갑니다~~ 팔로우도 하고 가요~~^^

감사합니다!!

수학이 만국공통어라는 이야기 생각지도 못했는데 읽어보니 공감을 안할 수가 없네요ㅎㅎ수학이 외국어 영향을 제일 적게 받는 과목이라 그런지 유학생들이 다른 과목은 못해도 수학만큼은 절대 지지 않는다라는 말이랑 딱 떨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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