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에세이]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2)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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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

코페르니쿠스의 가르침


   마음이 진실로 간절했던 덕일까요. 이내 눈꺼풀이 조금씩 떨려오며 의식이 흩어져 감을 느꼈습니다.

   “과학신이시여, 이 자리에 오셨다면 동그라미를 그려주소서.”

   어릴 적, 친구들과 펜을 맞잡고 강령의 의식을 치를 때면, 귀신의 방문을 확인하던 유서 깊은 절차였습니다. 아무리 존귀한 과학신일지라도 혼령의 본질은 동일할 터.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제 손은 저절로 칠판 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아마 제가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생각하며 전혀 눈치채지 못 하였겠지만, 저는 이미 제 몸에 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식의 창 너머로 흐릿하게 너울대는 형체가 보였습니다.

   “과학신이시여, 미천한 몸으로 과학신의 존함을 여쭙나이다.”

   불투명했던 형체는 질의에 반응해 점차 또렷해지며 사람의 모습을 띠어 갔습니다.


...


Solar system & Copernicus.png

   오오, 제 절박한 부름에 응답한 과학신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였습니다.

   “나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다. 무슨 일로 나를 애타게 찾았느냐? ”

   “외람되오나 이 수학 문제를 좀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서 혹시 누군가는 대체 어떻게 저와 코페르니쿠스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겠습니다만, 본래 혼과 혼의 대화는 상(像)의 교환으로써 이루어지며, 언어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무속인들이 고대 중국인인 관운장關雲長이든 세계 2차대전의 미국인 영웅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이든 국적을 따지지 않고 장군신으로 모실 수 있는 까닭도 이와 같습니다.

   하여간 저는 16세기의 대학자 코페르니쿠스를 모시고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과학신이시여, 제가 어찌 문제를 풀면 되겠나이까?”

   “어렵지 않다. 새겨 들으라. 내가 태어나기 1,300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송구하오나 그렇다면 1, 2세기 즈음의 이야기가 아니오니까? 하오나 문제는...”

   “허허. 내 지혜가 필요 없다면 나는 그만 돌아가겠다.”

   “아.. 아니옵니다! 들려주소서!”

   역시 천재는 괴팍한 법. 왠지 모를 믿음이 갔습니다. 21세기의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푸는데 왜 그렇게 고릿적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리오,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너는 아느냐? 수학을 좋아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하학적 도형에 의미를 부여하곤 하였다. 피타고라스도 꽤 유별났지만, 플라톤의 경우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정다면체 모양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그들은 구(球)를 가장 완벽한 도형으로 여겼다. 그들이 보기에 고귀한 천체들은 모두 구형이었고, 완전한 원운동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미천한 땅위의 존재들은 불완전하게 각진 도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직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원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원불변을 상징하였고, 직선 운동은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성을 상징하였다.

   그들이 하늘을 관찰한 바 해와 달에서 구와 원을 찾아내고 완벽한 도형으로 여기게 되었는지, 아니면 끊어지지 않는 매끄러운 곡면의 아름다움에서 완벽함을 발견하고 이 관념을 하늘에 투영하기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이 먼저이든, 그들은 우주가 구체와 원운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우주의 형태는 그림1과 같았다.


그림1

   태양과 같은 천체가 천구(天球)라는 투명한 껍질 위에 존재하고, 이 천구가 지구를 중심으로 일정한 속력을 유지하며 회전하는 식이었다. 속력이 각기 다른 여러 천체들을 설명하고자 수많은 천구들이 도입되었고, 가장 멀리에는 별자리가 수놓인 항성천구가 놓였다.

   그러나 이는 정밀한 관찰 없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당위로만 세운 이론이었다. 일정한 속력이란 가정도 원운동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불변성에서 나왔다. 당연히 실제의 천체 운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특히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금성과 같은 행성은 그 밝기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는 지구와 행성 사이의 거리가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에 그림2와 같이 이심(eccentric)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지구를 회전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둠으로써 지구와 행성 사이의 거리 변화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림2

   물론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관측결과 행성은 때때로 궤도를 역행하였고, 행성의 속력도 지구와의 거리에 따라 달라졌다. 그리스인들은 그림3과 같이 주전원(epicycle)의 개념을 고안하며 동시심(equant)을 또한 가정하여야 했다. 행성이 주전원을 따라 원운동을 하고, 주전원의 중심이 동시심을 기준으로 같은 각속도를 유지하며 이심원을 따라 운동하는 모형이었다.


그림3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실제의 관측값을 이용해 각 행성의 이심, 동시심, 주전원 등을 계산해 내었는데, 관찰하는 행성마다 고유의 속도와 경로가 있었으므로 전부 다른 계산값을 가졌다. 무척이나 복잡한 계산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천체의 운행을 예측할 수 있는 훌륭한 이론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천 년이 넘도록 우주의 구조로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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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저기.. 과학신이시여! 대체 이 이야기가 수학 문제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나이다.”

   초조한 마음에 저는 코페르니쿠스의 말을 끊었습니다. 그의 설명은 너무 길었습니다. 대관절 천동설이 수학 풀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학생들은 한참 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습니다.

   “무엄하구나! 내 말을 더 들어보거라.”

   쓸데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것도 모자라 되려 화를 내다니!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며 그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하였느냐? 그래,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은 그럭저럭 천체의 운동을 잘 설명하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천동설로는 달의 크기 변화조차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 이심, 동시심 따위는 무결한 하늘에 걸맞지 않는 지저분한 낙서와 같았다. 우주의 원리는 더욱 단순하고 아름워야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새로운 변수를 억지로 만들어 행성의 원운동과 등속성을 지켰으나, 나에게 이는 결코 만족스러운 방식이 아니었다.

   이에 나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기로 하였다. 바로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지축이 기울어진 지구의 자전 현상을 더하였다. 공전은 계절 사이의 변화를, 자전은 하루 동안의 변화를 설명했다. 아울러 프톨레마이오스가 가정했던 수많은 원과 중심점을 제거하고도, 행성간 공전 속도의 차이만으로 행성의 밝기 변화와 역행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내 이론이 결국 옳았으며, 이후 케플러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다.

   당시로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발상은 혁명적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었지,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등을 돌려 낮밤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상식적으로 마차에 타면 마차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듯이, 지구가 움직인다면 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지상 위에 살아가는 범인(凡人)들에게 땅이 고정되어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날로 복잡해져 가는 천문학 이론의 원인은 땅에 대한 믿음에 있었으나, 아무도 이를 의심하지 못하였다. 천 년이 지나 나에 이르러서야 땅에 꽂힌 시선을 하늘로 옮기고, 복잡하게 얽힌 이론들을 풀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지나치게 복잡하고 난해한 풀이는 고정된 관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 업적은 후대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니, 그는 자신의 새로운 철학적 태도를 일컬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칸트는 그동안 형이상학이 가진 철학적 헤메임의 원인이 인식의 객체가 아닌 인식의 주체에 있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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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 그만해 이 자식아!”

   저는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칸트를 운운하는 순간, 그가 하는 이야기의 목적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이 뒷방 늙은이는 자기 자랑이 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잘나가던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왕년에는...’이라 말한다지만, 간절하게 빌어 나타난 과학신까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뉘예~뉘예~ 위대하신 과학신이시여~ 지동설을 생각하시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 ...”

   제 속에서는 더 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 화를 눌러 담아 그에게 조만간 수고비 명목으로 마카롱 몇 개 태워줄 것을 약속하고 얼른 돌려 보내야 했습니다.

   “한 시간 뒤에 양껏 공양하도록 하겠나이다.”

   “그래! 다음에 또 만나자꾸나”

   그는 결국 이렇게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고 공양만 챙겨 떠나갔습니다.

   이런,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재빨리 눈동자를 제자리에 바로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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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과 달리 저는 백묵을 쥔 채로 칠판에 원을 그리던 자세 그대로였습니다. ‘이 자세로 얼마나 있었던거지?’ 민망함에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시간도 그대로였습니다. 들어온 정보의 양만큼이나 시간이 흐른 줄 알았지만, 실상은 눈깜짝할 사이의 시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구운몽의 성진이 하룻밤 사이에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았듯이, 도를 이용한 상(像)의 교환은 탄지경 간에 일어나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안도의 숨과 함께 다시금 문제 풀이의 압박이 느껴지던 그때였습니다.

   ‘그래, 시간이 넉넉하다면 지갑이 허락하는 한, 과학신을 또 접신할 수 있겠구나!’

   무척이나 번뜩이는 발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일단 비용이야 어찌되었든 답은 무조건 얻어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모실 과학신은 좀 더 근래의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저는 다시 한번 정신을 모아 눈알을 뒤집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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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수학문제가 어떻게 풀릴까 기대하며 숨죽여 읽고 있었는데 "계속"이라뇨. 연속극 같은 구성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댓글에 이미 스포일러가 있군요!

역시 코페르니쿠스의 힌트가 강력했나봅니다ㅋㅋ

강령술까지...참으로 다재다능 그 자체입니다.

다음에 모실 신,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ㅎㅎ

코페르니쿠스가 회차를 늘리다뇨!

사실 4회분...입니다

아, 미리 아는 것은 좋은 것 같아요. ㅎㅎ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몇안되는 사람을 만나 엄청나게 긴시간 자랑하려고 했나봅니다.ㅋㅋㅋ 설마 다음 회차에 아인슈타인이 나오지 않겠죠?
아... 근데 결론이 궁금하다는.ㅋㅋㅋㅋㅋㅋ

들..들켰네요

정사각형의 한변인 선분 CD를 중심으로 놓고 생각해보면 타원이 만들어지는 듯한데... 그 타원의 정체는? 필요한 건 케플러적 전환?

스포일러지만 CD를 기준으로 삼으면 O는 반원을 그립니다! 왜냐하면 두 선분이 수직으로 만나는 점들의 집합이니까요!

그걸 말씀 드린 건 아니었는데 암튼... 점심시간에 밥먹으면서 그림으로 그려보니 바로 보이네요. 정사각형의 한변이 1이라면... 이렇게 구하면 되겠어요. 아래에 말씀하신대로 점 O의 자취인 반원이 생기고 중심을 지나는게 가장 머니까... 원의 방정식에서 O의 좌표를 구한 다음 A까지의 거리를 구하면 되겠네요. 생각해보니 그러면 최대값은 간단한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원의 반지름인 1/2을 더하면 답이 나오나? ;;;;
IMG_1859 (2)_LI.jpg

유레카~~~~~!!! 반지름(1/2) + 직사각형(가로 1/2, 세로1)의 대각선 길이(2분의 루트5)로군요. 알고보니 이렇게 단순할 줄이야....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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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이런ㅎㅎㅎ 이렇게 벌써 답이 나와버리다뇨.. 여러분, 이 댓글이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마지막 편입니다~!

역시 수학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하는 거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ㅋㅋ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기 마련이죠ㅋㅋㅋ

네, 머리로만 생각할 때는 A가 어떤 타원의 끝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손으로 그림을 그려보니 그냥 직사각형의 대각선이었네요ㅋㅋ 코페르니쿠스 다음은 아인슈타인? 운동의 상대성?

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중 일부를 다룰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문과생이 오랜만에 유쾌한 (이과스런? ㅋㅋ) 지적 유희를 즐겼네요. 왕자님 덕분에요.ㅎㅎ

즐거우셨다니, 글쓴이로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기다려보세요 일단 은행 갔다와서 정독할거니까요 ㅋ

무사히 다녀 오십시오ㅎㅎㅎ

ㅋㅋ 다 읽었습니다. 조금이나마 과학쪽으로 기운 글이라 제겐 더 재밌네용 ㅋㅋ
지구과학 시간에 천동설이 설명 못하는 부분에 대해 분명 배웠었던거 같은데
뭐 읽다보니 기억속에선 이미 사라져 있었나 봅니다ㅋㅋ 새롭게 다시 습득해갑니당 ㅋㅋ

천동설의 눈물겨운 노력이 지동설에 의해 한방에 무너질 때, 기존의 천문학자들은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원을 정말 열심히 그려냈을텐데 말입니다.

훌륭합니다.
이해하는 척하며 오큐합니다.

ㅋㅋㅋ감사합니다

크으으으 댓글이 더 어렵..

제가 마지막 편에 잘 정리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ㅋㅋㅋ

코페르니쿠스는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했겠죠!!

다 제 잘난 맛에 사는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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