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35. 월남의 패망과 티우 대통령

1973년 파리평화회담이 체결되고 월남이 패망하는 1975년까지 이대용은 경제공사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미국은 총 80억달러의 재건기금을 마련하여 월남에 40억달러 월맹에 40억달러를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초창기부터 재건사업은 지지 부진했다. 월남 내부가 혼란스러워 제대로 사업을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베트콩들의 역할이 컸다. 베트콩들은 월남내부의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다. 거짓사실을 유포하여 월남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한 활동이 주안이었다. 소위 합법적인 수준에서 월남을 혼란에 몰아 넣으려고 했다.

결국 재건을 지원하기 위한 실사단이 온 것은 1975년 2월이었다. 미국의 실사단은 우선 월남에서 재건을 위한 사업을 구상했다. 하노이 일대의 재건, 농촌의 재건, 발전소 부두 등 각종 SOC 건설 방향의 정리와 같은 일을 했다. 약 7-80명 정도의 실사단이 방문해서 약 한달 정도 실사를 했다. 실사단은 작업을 마치고 월맹지역으로 가려고 준비하는 상태에서 월맹이 처들어 온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월남군은 초전부터 패퇴를 거급했다.

티우 대통령은 즉각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방위조약을 이행하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월남군은 너무 무력하게 무너졌다. 미국의 와얀드 육군참모총장이 월남을 방문했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월남군을 다시 모아서 방어선을 구축하려면 7억 2천만달러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다. 다랏과 환람을 잇는 선에서 방어를 하면 월맹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월남에 더 이상의 지원이 불가하다고 보고 4월 19일 지원예산을 부결했다. 티우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자 사임을 했고 월남은 붕괴하게 된다. 이대용은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월남이 패망한 가장 큰 이유를 부패라고 생각했다. 월남은 월맹보다 몇배나 잘 살았다. 국력도 강했으나 뿌리깊은 부패는 모든 것을 허사로 돌려 놓은 것이다.

월남의 부패가 그렇게 뿌리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티우와 그 주변의 측근들은 부패하지 않았다. 나만 깨끗하다고 해서 주변의 부패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월남 패망이후 티우와 그의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은 모두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이대용은 월맹에서 5년간의 억류에서 풀려난 후 미국을 방문했다. 거기서 티우를 만났다. 티우는 미국에서 매우 어렵게 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했던 사람들도 모두 가게와 택시운전사를 하면서 근근히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티우는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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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패망은 정말 많은 교훈을 주는 사건이었죠.
한 나라의 대통령 까지 했던 사람 조차 저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다니... 부조리는 어느 나라나 똑같이 존재하는 듯 합니다..

그래도 티우 대통령은 청렴하신 분이네요.
누구는 29만원도 없다면서 호화를 누리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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