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34. 1973년 파리 평화회담의 체결과 이대용의 티우에 대한 조언

이대용이 경제 공사로 부임하게된 이유는 미국이 월남에 80억달러의 원조를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대용을 월남으로 보내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사업에 지원을 하도록 하고자 했다. 이대용도 그런 뜻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우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1973년 파리 평화회담이 성사되면서 미국은 월맹이 월남을 공격하면 즉각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파리 평화회담이 성사된 이유는 1968년 월맹의 구정공세 때문이었다. 월남 패망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구정공세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정은 월남 최대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약 3일간은 서로 암묵적인 휴전기간이었다. 1968년 1월 30일 부터 약 보름동안 구정공세를 감행했다. 그 기간에 월맹이 공세를 감행한 것이었다. 워낙 무방비였기 때문에 미국대사관도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국 대사관은 약 5-6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5-60명이 공격해서 대사관을 점령했다. 미측은 최루가스를 투입해서 반격하고 그들 모두를 사살 또는 포로로 잡았다.

구정공세 이후 총반격이 이루어졌다. 그 공세로 인해 베트콩으로 알려진 월남의 인민혁명당 14만 중 약 절반이 피해를 입었다. 그로 인해 베트콩은 모집을 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월맹은 정규군을 월남에 파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정치에서는 실패했다. 미국내에서 반전여론이 몰아쳤다. 케네디와 풀브라이트가 평화회담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쭝딘쥬(Truoung Dinh Azu)와 같은 월남내 평화주의자들도 평화회담을 주장했다. 나중에 월남내에서 활약했던 거의 모든 평화주의자들이 월맹의 공산당원이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미국의 반전여론으로 파리평화회담이 체결되었다. 미국은 월남이 평화회담에 동의하도록 구슬렀다. 만일 월맹이 처들어 오면 미 7함대와 공군으로 즉각 북폭을 재개한다고 약속했다. 이와함께 4개국으로 구성된 국제감시위원단이 남북에 모두 와 있었다.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모두 다 취했다. 게다가 미국이 모두 80억달러의 자금을 투입해 월남과 월맹을 재건하겠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

한편 파리평화회담이 성사되는 과정에 이대용은 티우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지금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 공수사단과 해병 각각 1개 사단씩 밖에 없는데 그것을 군단으로 확장하라고 한 것이다. 만일 월맹이 다시 공격을 하면 제일 싸움 잘하는 해병군단과 공수군단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일 싸움 잘한다는 전통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티우는 웃으면서 이대용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북이 더 이상 싸움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월맹은 약 200만톤의 식량이 부족한데 100만톤은 공산권의 강냉이를 사 오고 있고 나머지는 모자라서 굶고 있다는 것이다. 병사들도 하루 세끼를 먹지 못하고 두끼만 먹는 실정이다. 그리고 반찬도 없어서 소금을 먹고 있다. 그리고 미군의 북폭을 무서워해 벌벌 떨고 있다. 적어도 월맹이 10년 정도는 개발을 해서 먹을 것을 해결해야 전쟁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티우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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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와 오버랩되어 보이네요
물론 티우도 선조와 오버랩되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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