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19. 제6관구에서 박정희와의 인연
6관구로 이동하게된 것은 동기생 강완채 덕분이었다. 당시 강완채는 육군본부에서 장교들의 보직을 관리하는 과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강완채는 “좋은데 있는데 왜 자꾸 거기서 나올려고 하느냐”고 했다. “돈이 없으면 안되지만, 너무 지저분해서 있을수 없다”고 했다. 이대용은 자신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후생금을 나누어주는 것을 받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6관구로 가기로 결정하고 있는데 박정희가 6관구 사령관으로 왔다. 제6관구로 가자마자 미제8군으로부터 서울철수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박정희는 참모장과 이대용만 불러서 철수계획을 수립하라고 했다. 서울에는 철수해야할 부대가 60개가 넘었다. 그 중에 이대용을 피곤하게 한 것은 헌병들이었다. 계획을 수립하고 나서는 해당부대의 협조와 동의를 얻어야 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은 “6관구가 왜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라고 했다. 수사단(CIC) 본부에서는 “우린 우리대로 할테니 걱정하지 마시요”라고 했다.
경찰 철수에 관련한 계획도 이대용이 세웠다. 경찰에 협조를 하러갔다. 철수할 때 차량을 통제하기 위해 교통과장과 협조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교통과장을 만나러 갔으나 만나기 어려웠다. 교통과장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 책상에 들어 있는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일이었다. 운수업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돈을 뭉치로 놓고 가는 것이었다. 박정희에게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각하가 좀 말씀 해주세요”라고 했더니, “나쁜 놈들” 그러더니 “내가 간다고 되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제2군단에서 이대용을 작전참모 요원으로 요청했다. 김형일 장군이 직접 요청한 것이었다. 군단의 작전참모로 가면 바로 대령으로 진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대용을 보내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대용을 불러서 “임자는 안돼 ! 작전참모 못가 ! 임자가 떠나면 철수계획을 누가 만드나?”라고 했다. 철수계획을 다만들고 관련기관과 부대의 협조를 얻어 결재를 받는데 3개월 정도 걸렸다.
철수계획을 마치고 제2군단에 갔는데 이미 작전참모는 다른 사람으로 임명이 되어 있었다. 군단에서도 몇개월 동안 작전참모를 비워둘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어있는 인사참모를 했다. 인사참모를 하다보니 재미도 없고 답답했다. 마침 미국 참모대학의 시험이 있다고 해서 응시를 했다. 합격을 했다. 세번째로 합격했다.
1960년 8월부터 61년 1월까지 단기과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시험을 치는 것은 거의 A를 맞았지만 회화는 시원치가 않았다. 교육을 마치고 3월에 다시 육군대학에 교관으로 복귀했다. 대령으로 진급도 한 상태였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참..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a very useful article sir,i really admire your works sir @wisdomandjustice
읽을수록 끌리네요.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욕하지만...
인정할건 인정하는 시대가 오길 바랍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님이 그 당시에 좀 막무가네로 밀고 갔기에 잘 살게된 기초가 생겼다는건 부인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강단도 있고 머리도 비상하셨던 것 같습니다.
시험 치는 족족 다 합격하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