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7, 6월 26일 한국전쟁 최초의 공세행동, 파쇄공격을 실시하다.

아침에 안기수 하사로부터 전쟁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았던 때가 8시 30분이었다. 북한이 남침하고 4시간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길로 부대에 들어갔다. 군화와 철모를 찾았다. 가져온 군화가 모두 작아서 신을수 없어서 방한화를 신었다. 가져온 철모에다 반창고를 오려서 계급장을 붙였다. 부대를 나선 것이 9시 30분경이었다. 1950년 4월과 5월에 걸쳐 육군본부에서 진지를 구축하라는 지시를 했다. 당시 작전국장 강문봉 장군의 지시였다. 북한의 계속적인 공세가 있었기 때문에 대비하라는 지시였다.

이대용이 지휘하던 1중대는 1대대의 제일 북쪽에 있었다. 1대대의 지위소는 우두산 164고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1대대가 진지를 점령했을 때가 10시 30분경이었다. 전방에 있는 부대는 다 무너진 것 같았다. 전방에 있던 중대장과 소대장들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전방에 보병이 거의 무너진 상태에서 16포병대대는 계속 적에게 포를 발사했다. 16포병대대가 보유하고 있던 대포는 105미리로 사거리가 7500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76미리포가 13300미터였다. 122미리 포는 20800미터를 넘는 사거리였다. 16대대 포병이 압도적으로 불리했지만 제1대대가 앞으로 나아갈때까지 진지를 지키며 대포를 쏘면서 북한군 보병의 진출을 저지했다.

제1대대가 진지로 투입하던 시간이 9시이전 이었다. 당시에는 이미 전방을 지키고 있던 7연대 2대대와 3대대가 붕괴되었던 상황이었다. 10시 30분정도에 1중대가 진지에 배치될때까지 제16 포병대대가 한계울과 역골로 들어오는 북한군 보병의 진출을 차단하고 있었다. 만일 그 당시 포병이 이들의 진출을 막지 못했더라면 제1대대는 진지를 점령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제1대대가 진지를 점령하여 전투태세를 갖추는 동안 제16대대는 계속해서 북한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6월 25일 12시 경부터 저녁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증언이 엇갈린다. 우선 심일과 육탄 5용사가 한계울에서 남진하는 북한군의 자주포를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공적으로 심일은 나중에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태극무공훈장에는 심일이 자주포를 육탄으로 파괴했다는 기사는 없다. 적이 공격해오는데 물러서지 않았다는 공적이 있을 뿐이다.

이대용 장군은 당시 164고지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6월 25일에는 심일이 옥산포에서 대전차포 2대를 가지고 있다고 1문을 잃어버리고 1문만 가지고 도망갔다고 증언했다. 당시의 북한군이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한 것은 포병의 활약때문이라고 한다. 포병의 활약에 대해서는 많은 증언과 기록들이 있다. 우선 소련의 군사고문관 라주바에프 보고서에도 제6사단 포병의 활약으로 인해 계획대로 진출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북한군 포로의 증언에도 제16포병대대의 사격으로 인해 진출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25일 오후의 전투기록은 매우 혼란스럽다. 읽어도 사건의 전후를 파악하기 매우 어렵게 정리가 되어 있다. 특히 포병의 활동은 제대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전쟁이 끝난후 제16포병대대 장병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춘천은 포병들이 목숨걸고 지켰는데 공은 엉뚱한 사람들이 다 차지했다는 것이다.

당시 연대장은 소양강 남쪽의 봉의산에 있었다. 25일 저녁이 되자 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있던 봉의산에 가서 북한군에게 역습을 가하겠다고 건의를 했다. 당시는 소양강 북쪽이 있는 제1대대를 철수시켜 소양강에서 방어를 하자고 하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소양강에는 다리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방어를 하기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용배 소령이 역습을 제안했다. 우두산 164고지 근처까지 내려온 적의 측면을 역습으로 공격하면 적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용배의 기습공격 계획을 들은 이대용은 아연실색했다. 26일 오전에 이미 북한군은 자주포 5대와 함께 옥산포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규모면에서 북한군과 1대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용배는 연대장의 허락을 득했다면서 기습을 달성하면 병력의 열세는 문제가 안된다고 설명했다. 전병력이 100미터 달리듯이 공격하면 박격포와 포병이 지원사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26일 동이 트기전에 김용배는 중대장 3명을 모두 모아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10시 30분에 전대대 병력이 옥산포에 있는 북한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3개중대 약 400명 정도의 병력이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포병도 정확하게 옥산포의 적을 타격했다. 기관총과 박격포도 지원사격을 했다. 혼비백산한 북한군은 자주포 5문을 남겨놓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도망가면서 자주포 1대는 스스로 파괴시켰다.

대대는 도망가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한계울 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연대에 보고해서 북한군 자주포를 가져가라고 보고하고 계속 추적했다.

한계울쪽으로 적을 추적하던 제1대대는 다시 진지로 철수했다. 북한군이 우두산 164고지 방향으로 진출해오면 제1대대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북한군이 남겨둔 자주포를 파괴하지 못했다. 수류탄으로 포신을 파괴하면 된다는 것을 알 고 있었으나 연대에서 가져간줄 알았던 것이다.

이작전이 한국전쟁 처음 방어시 실시한 방어시 공세행동이다. 세계전사에 유례가 없는 작전이다. 물론 이 작전의 성공은 대대장의 작전구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제1대대의 기동을 지원해준 포병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아마도 포병이 정확하게 타격을 하지 못했으면 적도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전을 구상하고 시행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용배 소령은 연대장때 전사를 했고 장군으로 추서진급했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전술에 있어서는 거의 군신이나 마찬가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 누가 그를 기억하는가 ? 우리는 진정한 영웅은 잊어 버리고 기회주의나를 영웅이라고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녹취록 1, 2, 3, 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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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레기 냄새나는 군발이들이 많아 우리 국군의 전쟁사가 흐려지지 않았나 합니다.

안녕하세요 @wisdomandjustice
흥미롭게 잘 보았습니다
팔로우 하고 과거의 글들도 읽어봐야 겠네요^^

방어를 하는 와중에 적의 진세를 예상하고 기습공격을 하다니 신의 한수였네요. 자주포를 파괴하지 못해 후에 포를 회수한 북한의 반격이 두려워집니다

전쟁 초기에 이런 공세작전도 있었군요.

미국처럼 전쟁영웅들을 존경하고 대우하듯이...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가족과 유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과 대우가 반드시 필요해보입니다

진짜 한국이 겪은 수 많은 전쟁중에는 숨겨지고 나타나지 않은 true 영웅들이 많이 있는것이 사실!! 오늘도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처음부터 쭉 읽어봐야겠네요.
팔로우하고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

실제 전투에서 공과 기록이 쉽지 않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 중에도 왜곡된 사실이 많이 있겠죠.
후대의 우리가 하나하나 검증하고 찾아봐서 소외된 영웅들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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