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33. KAL기의 월남 취항을 돕다.

녹취록 중에 이대용이 월남 정부가 KAL기 취항 승인과정에 개입한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녹취록에는 그 시기가 특정되지 않아서 정확하게 언제였는지는 확인이 필요함


KAL은 월남에 취항을 하고 싶었으나 월남 정부에서는 KAL의 취항을 승인하지 않았다. 동남아 지역까지는 모두 취역을 했으나 정작 승객이 많은 월남에는 취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KAL은 타임지에 월남에 취항한다고 선전까지 했는데도 월남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월남이 승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월남의 항공국장 때문이었다. 당시 월남의 항공국장은 매우 강직하고 고집스러운 인물이었다. 미국 유학파로 실력도 있었고 애국심도 있었기 때문에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대사관에서는 KAL의 취항과 관련하여 경제공사인 김자겸이 담당을 하고 있었다. 월남의 항공국장은 월남에도 국적이인 에어 베트남이 있으니 에어 베트남이 한국에 취항할때 KAL도 같이 취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KAL읕 태국을 거쳐서 베트남으로 가는 항로를 구상하고 있었다. 태국까지의 승객이 40명 정도였고 베트남까지 가야 이익이 나는 구조였다. 항공기에 약 120명이 타는데 그 중에 40명 정도면 운영비가 나오는 구조였다. 베트남까지 가지 않으면 이익이 나지 않았다.

먼저 KAL은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을 통해서 월남 국방장관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월남은 국방장관이 내무관련한 업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진척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KAL의 사이공 지점장으로 있던 이은현과 조중훈의 처남으로 퀴농지역에서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김형배가 찾아와서 이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대용은 난처했다. 티우 대통령에게 자꾸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사를 통해서 해결하라고 이야기 했다.

당시 한진은 매우 심각한 입장이었다. 잘못하면 월남에서 벌어 놓은 돈을 항공사업에 모두 꼴아 박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대사는 자신도 해결하기 어렵다면서 이대용에게 해결하라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우선 티우 대통령의 형을 만나서 상의를 하고 같이 티우 대통령에게 찾아 가기로 했다. 10월 1일 KAL기가 동남아 지역으로 취항을 해야 하는데 만일 사이공에 오지 못하면 태국까지 밖에 갈 수가 없었다. KAL은 월남 정부로 부터 항공운항면허도 받지 않고 먼저 덜컥 사업부터 시작해버린 것이다.

정상적으로 면허를 신청하려면 약 1년 정도가 소요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KAL기 취항은 1달정도를 앞두고 있었다. 티우 대통령을 만난 이대용은 사정을 이야기 했다. 월남에 1개 대대 밖에 보내지 않은 호주도 국적기를 취항시키고 있는데 한국 국적기를 취항시키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설명했다. 지금 1달 정도 남아 있으니 정식허가를 받기 전에 임시허가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티우는 한참 생각하더니 항공국장에게 KAL기 운항 임시 허가를 내주라고 지시했다. 이대용은 이은현 지점장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항공국장에게 가서 임시 운항 허가증을 받으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은현은 한국에 전보를 쳐서 승인이 떨어졌다고 보고를 했다. 당시 조중훈은 월남 취항이 안되자 망했다고 울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항공기가 출발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월남 항공국장이 그때까지 운항허가증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비행기는 하늘에 있는데도 운항허가는 나오지 않았다. 이대용은 다시 티우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때서야 항공국장이 이은현 지점장에게 허가증을 주었다.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서 KAL기가 취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간의 경과를 김자겸 경제공사가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고 해서 본부에 보고를 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취항해서 행사를 할때도 자신이 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조중훈은 이대용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대용이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돈은 드리지 않겠으나 나중에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시면 아주 좋은 집을 하나 지어 드리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것은 뇌물이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중훈은 그 이후에 태도를 싹 바꾸었다.

이대용이 월남에서 풀려난 이후 자유수호 운동을 하면서 필요한 비용을 헌금을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무시를 했고 사지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밥한끼 먹자는 이야기도 없었다.


내용으로 보아 두번째 정보공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일화로 보임.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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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인 블러그에서 녹취록을 해놓는것은 왜죠.
이유가 있나요.
알 권리인가요.
알권리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정보인데 이렇게 함부로 공개하셔도 되나요.

공개적인 블로그에서 녹취록을 정리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나요 ?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면 안되는 이유는 또 뭔가요 ?
오히려 중요한 정보는 공개되어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것이 블록체인 SNS의 취지입니다.
블록체인 SNS가 익명으로 운영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검열을 할 수 없고 운영자 마음대로 삭제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정보는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알수록 전체의 이익에 더 크게 기여합니다.

몰랐던 사실들을 흥미 진진하게 읽어서 좋지만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어서 염려가 되서 하는 얘기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전체적으로 크게 이익에 되면좋겠네여
님의 소신에 존경합니다.

장군님은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네요

이제와 생각하면, 죽쒀서 개 준, ... 그런 느낌이 드는군요.

은혜에 보답은 못할 망정...
이대용장군의 씁쓸하셨을 얼굴이 스쳐지나갑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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