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 레이스 + BOOK 100] 고양이 해변의 서핑 고양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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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해 질 녘 한적한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서쪽으로 한참을 걷다 보니 모래밭이 사라지고 해변을 걷던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었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바다도 덩달아 짙은 군청색으로 그 빛깔을 바꾸어 갔다. 제법 쌀쌀한 날씨였는데 일몰을 보겠다고 한참을 바다에 머물고 있었던지라 몸이 달달 떨렸다.

직선으로 쭉 뻗은 해변의 산책로가 오른쪽으로 크게 휘었다. 그 코너를 돌자 새로운 모래밭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 예쁘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가 산책로를 가로질러 바다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고양이들이 한 마리씩 슬금슬금 나타나더니 사방팔방에 온통 고양이였다. 한 아이가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비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집 안방 거닐 듯 유유히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파도가 부딪치는 바위틈 사이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위를 살피거나, 바위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 장면은 좀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고양이들은 물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고양이가 아닌 존재들 같았다. 그 해변은 완벽하게 그들의 세계였다. 해변을 걷다가 고양이들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바위 위에 새초롬하게 앉아있던 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고양이 해변에 온 것을 환영해."

"안녕, 안녕하세요. 그런데 넌 말을 하네. 말을 하시네요. 고, 고양이 아니세요?"

"넌 안 그렇게 생겨서 좀 답답한 구석이 있구나. 모든 존재는 말을 해. 알아차리는 건 듣는 사람의 몫이지. 네가 고양이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를 듣게 된 거야. 고양이는 말을 해. 언제나 인간들에게 말을 건네 왔고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 정도는 어디에나 널려 있지."

"그런데 너희 왜 해변에 사는 거야?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잖아. 파도가 제법 거칠어서 바닷물이 마구잡이로 튈 것 같은데..."

"네가 세상의 모든 고양이를 만나본 것은 아니지 않니? 세상엔 나처럼 해변에 살며 서핑을 즐기는 고양이도 있어. 파도가 높은 날이면 파도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맨발로 미끄러져 내려오곤 해. 그리고 여기 이 바위에 누워 타는 태양 아래 젖은 털을 말리는 거야."

"고양이가 파도 탄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본다.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기 힘들 것 같아. 미안."

"네가 살면서 쌓은 경험은 그야말로 우주의 먼지 수준이야. 네가 아무리 지구를 떠돌며 이것저것 구경하며 살고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하물며 그 얕은 경험에서 태어난 지식의 수준이라니... 쯧쯧. 어디 가서 뭐 안다는 소리는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고작 한 줌의 경험을 가지고 내 앞에 와서 네가 아는 세상이 이렇네 저렇네 할 필요도 없어. 내가 고작 이 해변에 콕 박혀 평생을 사는 고양이라고 해도 말이지. 넌 해변에 사는 고양이의 존재도 이제야 알게 되었을 뿐인걸."

"그런데 내가 지구를 떠돌며 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니? 그러고 보니 넌 좀 거만한 구석이 있구나."

"거만하다니? 정확히 반대야. 겸손한 거지. 겸손에 관해 그 옛날 메이지 시대에 도쿄에 살았던 한 고양이 선생이 남긴 기록이 있는데... 그분이 그 책에 뭐라고 썼냐면..."

"아, 혹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말하는 거야? 그건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이야."

"아냐. 엄격하게 말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는 고양이 선생이 구술한 것을 받아 썼을 뿐이야. 고양이 선생은 인간들이 놀라 나자빠질까 봐 끝까지 인간들 앞에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유일하게 나쓰메 소세키만이 고양이 선생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야. 나쓰메 소세키는 평생 불행했지만 그래도 고양이 선생을 만났으니 운이 좋았어. 난 사람이지. 서로 다른 종 간에 이루어진 위대한 소통의 기록 중 하나라고 생각해."

"나도 그 책을 읽었어. 책 읽으면서 그렇게 웃은 것은 처음이야. 정말 웃겼거든. 나중에 써먹으려고 웃긴 구절마다 밑줄을 쳐 둘 정도였어. 고양이 선생이 조롱하는 인간들과 함께 나도 덩달아 조롱당하는 것 같았다니까?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라고. 하나같이 맞는 말들을 하니 뭐... 잠깐만. 밑줄 쳐 둔 부분 보여줄게. 좀 긴데...

직업에 따라서는 거꾸로 치솟은 상태가 아주 중요하고 치솟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 시인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시인에게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은 기선에 석탄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공급이 하루라도 중단되면 그들은 뒷짐을 지고 밥이나 축내는 아무 쓸모없는 보통 사람이 되고 만다. 하기야 이 <치솟음>은 미치광이의 다른 이름이나, 미치광이가 되어야 밥벌이가 가능하다고 하면 체면이 서지 않으므로, 그들끼리는 치솟는 것을 치솟는다 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인스피레이션, 인스피레이션 하고 외치니,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이 인스피레이션은 그들이 세상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 낸 이름일 뿐 그 실상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들 편을 들어 이런 유의 치솟음을 신성한 광기라 이름 붙였는데, 아무리 신성해도 광기라고 하면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서는 인스피레이션이란 새로 발명된 매약 같은 이름 그대로 놔두는 편이 좋을 듯 하다.

그러나 어묵의 재료가 실은 참마이며, 관음상이 실은 5센티미터짜리 썩은 나무토막이고, 오리 국수에는 오리 고기가 아니라 까마귀 고기가 들어 있고, 소고기 찌개에도 소고기가 아니라 말고기가 들어 있는 것처럼 인스피레이션은 실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이고 그렇다면 일시적인 미치광이다. 이들이 정신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일시적인 미치광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시적인 미치광이를 만들어 내는 게 쉽지 않다. 평생 미치광이는 오히려 만들기 쉬운데, 만년필을 쥐고 원고지를 마주하고 있을 때만 미치광이가 되어야 하니,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신이라도 난해한 작업인 듯 좀처럼 만들어 보여 주지 않는다. 신이 만들어 주지 않으면 제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학자들이 피를 내려 보내는 방법 못지않게 피를 거꾸로 치솟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였다.

어떤 이는 인스피레이션을 얻기 위해 날마다 떫은 감을 열두 개씩 먹었다. 이 시도는 떫은 감을 먹으면 반드시 변비가 생긴다, 변비가 생기면 반드시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술병을 들고 열탕으로 뛰어들었다. 뜨거운 물속에서 술을 마시면 틀림없이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람은 술과 열탕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아예 포도주를 끓여 그 안에 들어앉으면 단번에 효능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돈이 없어 끝내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으니 딱한 노릇이다.

마지막으로 고대 사람들의 흉내를 내면 인스피레이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도 있었다. 이는 어떤 사람의 태도나 동작을 따라 하면 심적 상태도 그 사람과 비슷해진다는 학설을 응용한 것이다. 술주정꾼처럼 횡설수설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술주정꾼의 심적 상태에 이른다. 좌선을 하면서 향 한 개가 다 타들어 가도록 참다 보면 스님다운 심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인스피레이션을 얻었다고 하는 유명한 옛 대가의 행동거지를 흉내 내다 보면 반드시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이다.

들은 바에 따르면, 빅토르 위고는 요트 갑판에 드러누워 문장을 쥐어짜 냈다고 하니 배를 타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반드시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이다. 로버트 스티븐슨은 납죽 엎드려 소설을 썼다고 하니, 만년필을 쥐고 엎드려 있으면 반드시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냈으나, 아직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날 인위적으로 피를 거꾸로 치솟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회자된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인스피레이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날이 도래할 것이라 믿어 마지않는다. 그리고 나는 인문학을 위해 그 시기가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나도 글을 쓸 때마다 영감 타령을 정말 많이 하는데 이 부분을 읽고 좀 머쓱해졌지 뭐야.

아, 그리고 거의 마지막에 고양이 선생이 남긴 한마디만은 아직도 정확히 기억이 나. 그 한 문장을 가장 좋아해. 그는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라고 썼어. 고양이 선생이 인간들을 참 많이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내내 비꼬고 조롱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고양이 선생은 구샤미 선생도, 메이테이 선생도, 간게쓰 군도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그 마음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않았겠니? 두드려보지 않으면 절대 들을 수 없는 그 소리를 말이야."


어느덧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도 사진 한 장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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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해변에서 만난 고양이 덕분에 오래 미뤄두었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리뷰를 어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고양이 해변에 갔던 날 쓰려고 했지만 계속 못 쓰고 있었다. 오늘 말라가 시내에 나와 회덮밥을 사 먹었는데 한그릇 다 비우고 나니 그릇 바닥에 고양이 두 마리가 이렇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밥 먹고 나오자마자 급하게 스타벅스에 찾아 들어와 이 글을 썼다. 마음이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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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이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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猫神降臨
Spirit of cat comes


ps. 피가 치솟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100여년전 술동이에 빠져 급사한 고양이옹의 지혜)

세인의 평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내 눈동자처럼 변한다. 그런데 내 눈동자는 그저 작아졌다 커졌다 할 뿐이지만, 세인의 평가는 손바닥 뒤집듯 180도로 바뀐다. 그렇게 뒤바뀌어도 별 문제는 없다. 사물에는 양면이 있고 양 끝이 있다. 그 양 끝을 뒤집어 흑백을 백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융통성이다. 방촌(方寸)을 뒤집으면 촌방이 되는 것에 재미가 있는 것이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가랑이 사이로 아마노하시다테를 보면각주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셰익스피어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셰익스피어여서는 시시껄렁할 뿐이다. 가끔은 가랑이 사이로 햄릿을 보면 <자네, 그럼 안되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문학계도 발전이 없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각주: 스팀잇에도 이런 수컷 농작물이 한 마리 있다

@copyright by @ioioioioi

오이님의 포오즈는 인스피레이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네요... 말잇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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