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인생템 # 1 "프리마"

in #kr6 years ago (edited)

수수단상표지2.jpg


커피크림. 사실 지금도 그 물건을 커피크림이라고 부르는게 여전히 어색하기만 하다.

역시 '프리마'다. 사실 좀 더 발음이 좋은 사람들(?)은 '프림'이라고 끊어 읽어준다면 그건 약간 고급진 발음이었다. 당시의 내게 가장 멋진 어른은 20대 후반- 30대중반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프림'이라고 발음했지, 프리마라곤 발음하지 않았다. 그 '프림'이란 스타카토틱(?)한 발음이 왜 그렇게 멋지게 들렸었는지.

80년대 초반 아직 10대가 되지 않았던 내게 가장 귀하고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우유였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남* 회사에서 나온 3.4란 제품이 그중에서도 특히 내 목표였다. 나는 그 두 개의 숫자가 햇갈려서 무슨 4.3 혹은 5.6 뭐 이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라고 무조건 기억력이 좋은 건 아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통에 눈에 보이는 게 다 신기하고 배우는거라 애들의 산만함 뒤에 분산되는 집중력은 엄청 짧다. 어른들이 "내 아이가 왜이렇게 정신이 없는가"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어른들이 정신이 없어서다. (자신이 어릴 때 얼마나 정신없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아, 물론 나는 어릴 때 또래들보다 좀 더 정신이 없기도 했다. 지금도 산만함 때문에 오랜시간 집중을 잘 못한다. 뭔가를 잘 잊어버리기도 하고. 15세부터 사고치던 내 선천성 건망증에 대해선 다음에 한 번 다루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우유를 먹어본 게 내 기억엔 열 번이 채 되지 않는다. 꼭 금수저로 (당시 좋은 표현으로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 우유가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내 주변의 어른들은 아무도 그 우유를 챙겨주지 않았다. 200ml 한 팩이 150-200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당시 라면이 90원 - 130원 정도였으니 내 기억이 맞다면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우유가 귀했고, 나는 늘 옅은 갈색병에 든 프리마가 물에 녹이면 우유가 될 거라고 믿었다.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되는 것 처럼 우유를 넓은 판에 부어서 말리면 프리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피를 타며 설탕 둘 프림 둘, 잘만 먹던 어른들은 애들은 먹는게 아니라며 프리마를 자기들끼리만 낄낄거리며 먹어댔다. 어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저걸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어떻게든 얄미운 어른들 몰래 저걸 타 먹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나는 여러번 잡아서 프리마를 물에 타 먹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잘 녹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어느날 가루가 찬물에는 잘 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상당히 놀라게 되었다. 그 긴시간 동안 그걸 몰라서 훔쳐먹는 내내 반쯤은 씹어먹었다니. 물론 그게 싫다는 뜻은 아니다. 반쯤 녹은 물 사이로 하얀가루가 부서지면서 은근한 단 맛을 낼 때 그 희열 또한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인지 지금도 내 입맛엔 미숫가루 같은 걸 엄청 좋아하는데, 다행히 이 전통음료가 없어지지 않고 매니아들이 있으며 '선식'이란 좀 비싼 버젼도 유행한다는 건 참 다행이다. 또 우리나라 카페엔 가끔 곡물쉐이크란 멋진 이름으로 팔고 있다.

어릴 때 내게 프리마의 고급버전은 분유였다. 시골에 왠만한 집은 가면 다 아기들이 있었고, 지금과 같은 크기의 깡통에 분유가 대부분 있었다. 나는 그것도 숫가락으로 몰래 퍼먹곤 했다. 분유의 뚜껑은 얇은 고무느낌 플라스틱 이었고, 슬쩍 열었다 닫아도 소리도 나지 않아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훔쳐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가에 대놓고 묻어있는 분유가루를 처음엔 뭔가 생각하며 유심히 쳐다보던 어른들의 시선에서 이미 들켰다는 건 내 계산에 없었다. 물론 들켰다는 사실도 당연히 몰랐다. 그게 분유일거라고 당연히 알면서도 물어보지도, 아는체 하지도 않았던 이들. 그 땐 그 정도는 아이들에게 용서되던 시절이었고, 또 당시 어른들의 스케일이었다. 아이들의 작은 욕심을 모른체 해줄 수 있는 사람들. 어른이 되고 난 뒤에 돌아보니 그들이 아이인 내게 몇 안되는 진짜 어른이었다.

한 6월, 더울 때마다 음료수를 솥으로 마시던 나는 냉커피의 매력에 빠져서 커피색인지 프림색인지 모를 진한 커피에 엄청난 설탕을 부어 얼음을 넣어 대접에 부어 마시고는 그 달콤했던 카페인 때문에 밤새 잠못들던 기억이 난다.

여튼 3.4우유는 몇 번 못먹었지만, 내가 어른들 몰래 훔쳐먹은 프리마는 기억속에서만도 열댓병 되는 것 같으니 지금 생각해도 므훗한 기억이다. 거기다 고급버전인 분유를 이집저집에서 훔쳐먹었던 걸 다 모으면 내 도둑질은 결코 경범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제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우유가 내게 쉽게 허용될 무렵, 나는 우유를 늘 냉동실에 슬쩍 얼려먹곤 했다. 성격 탓인지, 마시는 것의 온도는 자극적인 것만 추구한다. 아주 차거나 아주 뜨거운 걸 선호하다보니.

나는 감기에 자주 걸렸었는데, 감기에 걸려 뭔가 목이 칼칼할 때 냉동실에 얼린 우유를 마셨다가 심한 기침소태로 제대로 고생을 한 이후인 것 같다.

원두커피를 갈아마시면서 커피믹스는 손도 안대다가 요새 가끔 그 달콤한 맛에 다시 젖어든다. 여행을 떠날 때 커피믹스는 최고의 필수품 중 하나인데 여행을 핑계로 재 둔 커피믹스를 입이 심심할 때 마다 타먹다가 금새 인이 배였다. 사실 여기에는 스팀잇의 든든한 이웃인 @jack8831님이 한몫했다. 한국에서 책을 선물하시며 지난 공수물자 지원에서 다양한 종류의 커피믹스를 보내신 탓이다.


@soosoo였습니다. 프리마 이야기를 시작으로 인생템들 몇 가지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수단상] 다른 글
[수수단상] 단편시리즈
Sort:  

Hi @soosoo!

Your post was upvoted by @steem-ua, new Steem dApp, using UserAuthority for algorithmic post curation!
Your UA account score is currently 3.964 which ranks you at #3632 across all Steem accounts.
Your rank has dropped 13 places in the last three days (old rank 3619).

In our last Algorithmic Curation Round, consisting of 325 contributions, your post is ranked at #185.

Evaluation of your UA score:
  • You're on the right track, try to gather more followers.
  • The readers like your work!
  • Your contribution has not gone unnoticed, keep up the good work!

Feel free to join our @steem-ua Discord server

프림보다는 분유죠 ㅎㅎ

커피 먹으면 머리 나빠진다면서 ... 어른들끼리 꺄르르꺄르르 먹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_-;

그래서 저는 어린나이에 2 4 4 로 커피를 몰래 타먹다가 걸려서 참 많이 뚜까 맞아었는데... 그게 맞을일인가 싶었습니다. ㅋㅋ 그때는 커피를 먹는게 그래 잘못인가? 진짜 억울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냥 말을 듣지 않아서가 더 큰 이유 였던것 같네요.

ㅋㅋㅋ 2 4 4 ㅋㅋㅋ 그러게 말입니다. 말을 안듣는게 문제였네요. "아이들은 항상 어른의 편의에 따라 그들이 하자는대로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다 우리 잘되라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 잘 되라고'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으면 좋았을텐데 싶어서..... 제가 어른이 되서는 그러려고 노력중입니다. ㅋㅋ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tailcock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큼 부끄럽습니다만 ^^

조카 분유 먹는 맛이 나름 괜찮았었는데요...
맨입에 넣어야 진한맛을 느낄수있었죠..
프림은 좀 아닐듯..ㅋ

@odongdang님도 저와 비슷한 짓을 하셨군요 ㅋㅋ 맞습니다. 역시 분유는 맨입이죠. 요새 분유값 장난 아닙니다.... 너무 많이 뺏어먹진 마셔요 ㅋㅋㅋ

프리마 분유
정말 맛있고 향수를 자극하는 하얀 가루들이네요
달지만 담백함이 있고ㅎㅎ
저는 한국갈 때마다 혹시 지하철 자판기에서
"우유" 있으면 그것 꼭 마셔요
추억의 그맛!

@mintvilla님 맞아요 맞아요~~자판기 우유 그거 딱 프리마 같아요~~~ ㅋㅋㅋ 그거 아직 있어용? 발견하기 되게되게 어려운뎅... 아웅

이오스 계정이 없다면 마나마인에서 만든 계정생성툴을 사용해보는건 어떨까요?
https://steemit.com/kr/@virus707/2uepul

보팅주사위2

@보팅주사위2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5
JST 0.029
BTC 63061.76
ETH 2602.70
USDT 1.00
SBD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