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단편-수제맥주, 공인인증서"steemCreated with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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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수제맥주, 공인인증서"


저녁 10시. 회식에서 먼저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꼭 끝내야지 하는 개인적인 업무를 해결해야 한다. 1년 가까이 벼르던 일이다.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마음대로 정한 "오늘 할일은 내일로 미루자"란 소신대로 나는 꽤 오랫동안 살아오는 중이다. 가끔 날짜를 놓치고, 기한을 넘기고 상당한 단점들로 덕지덕지 꿰메고 다니는 것 처럼 나를 보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아도 이런 컨셉이 정작 내 인생에서 큰 문제가 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름이나 한 달 만에 한번 씩 돌아오는 밀린 마감을 밤새서 할 때 너무 피곤하다고 여겨지만, 그렇게 떼우고 나면 역시 한달 간은 남들 보다 훨씬 느리게 가는 시계를 따라 사니까. 해본적은 없지만, 만약에 이 느낌을 계산기로 두드려 보면 나는 보통의 우리나라 인구의 수명의 약 4-5배의 수명을 누리는 셈 쯤 될 것이다.

전통적인 시각을 가진 다른 분과의 직장 선배들은 그게 못마땅 한 지 연신 나를 비꼬고 틈만 나면 수업료 약 1억쯤 하는 수업을 내게 공짜로 베푸는 것 같은 얼굴로 진지하게 나를 보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반복해 댄다.

"조선생, 업무가 공부고, 공부가 업무 아닌가, 규칙이 중요하단 말이지. 우리가 공부할 땐 잠을 아껴가면서 했어. 그 땐 당장 배를 골았잖나. 끼니 때 밥이 뱃속에 들어가는 것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아나... 밥이 어쩌고... 돈이 어쩌고... 효도... 도리... ... ... 지직... 지직 치..."

문제는 그들이 내게 하는 이야기가 딱 그 내용에서 당최 앞으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좀 지겹다는 것을 빼면 다 좋고 옳은 말이긴 하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아. 오늘 저녁엔 끝내야 할 일. 낮에 있었던 평범하고 지겨웠던 일들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어 털어버리고 다시 집중한다. 하지만 이내 못차린 내 정신이 오늘 회식 때 갔다면 마셨을, 못마신 수제맥주에 대한 환상으로 허우적 거린다.

우리 일터의 회식은 "업무의 연장"은 아니다. 서로 못해서 안달이다. 그게 다 708호 인문사회분과의 분과장님을 잘 만난 덕이다. 포차에서 김치찜 파는 허름한 고깃집에서, 국숫집에서 놀지만 분위기는 거의 룸싸롱(?) 급으로 환상적이다. 하나씩 연구하고 보고들은 술제조법을 배워서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분과장님은 분위기만 좋으면 조원들과 그냥 스무살 씩 차이나는 조원들과도 그냥 형님동생이다. 업무볼 때 진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 길거리에서 남자들끼리 부등켜 안고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남이 보면 온갖 추태를 보이지만, 제정신 아닌 상태에서 하는 행동을 술김에 느낄 때 아마 우리 그룹의 모든 사람들은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이 있으면 '난 바빠서 먼저 가요' 한 마디만 던지고 돌아오면 되는 그런 분위기다. 물론 뒤에 대놓고 입에 못담을 욕설이 택시 잡으러 나온 큰 길까지 고래고래 들려온다. 특히 분과장님 특유의 그 걸쭉하고 큰 목소리는 나를 잠간 주춤하게도 했다.

"조선!" (분과장님은 술자리에선 '생'자를 빼고 나를 저런 애칭으로 부른다.) "너 정말 수제맥주보다 중요한 일 맞아? 후회할텐데!"

왁자지껄 나 들으라고 그 큰소리로 하는 그들의 악의없는 웃음과 야유들이 역설적으로 나를 더 편안하게 한다. 그건 내가 택시를 타고 안보일 때 쯤이면 그들은 내 칭찬과 걱정을 해줄 거란 싸인이기도 하니까. 물론 내가 잘나고 특별해서는 아니다. 누가 먼저 떠나도 우린 그래왔으니까. 그런 사람들과 일을 하니, 피곤해도 다들 좀체 집에 가려고 하질 않는다.

아차. 진짜 일을 해야 한다.

노트북을 열었다. 지긋지긋한 윈도 시스템을 버리고 맥으로 바꾼지 3년차. 이젠 그 익숙하던 시스템을 내 머리와 손 끝에서 빠르게 지워나갔다. 하지만 기계는 기계다. 말썽을 부린다. "오늘은 제발 그냥 좀 넘어가자..."

10여년 전 재미로 시작했던 S증권계좌. 몇 년간 묻혀있다. 오늘 저녁엔 기어이 이 계좌를 정리해야 한다. 거기 있는 잔고 50만원을 빼야 이번 달 밀린 카드값을 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잃어버린 계좌번호도 전화로 찾아뒀고, 대충 준비가 되었다.

'공인인증서'. 들어가자마자 숨이 턱 막힌다. "안돼.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은 이걸 넘어서 가자"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처럼 궁시렁거리며 다시 침침한 방에서 스스로 한번 독려를 해본다. 그리고 보안 프로그램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들의 출처를 모르겠다. 공식적인 웹에서 설치해 주는 것 치고 그 조악한 디자인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나마 하나면 참아줄 만도 한데, 설치목록에 나열된 그것들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키보드 로그보안, 모니터 보안, 바이러스 방지, 애드프로그램 회피, 공인인증 토큰...' 사실 이것들은 내가 3일전에 K*은행 인터넷 뱅킹을 할 때 다 거쳤던 과정이다. 이걸 S증권은 또 하라고 하는 것이다. 보나마나 뻔하다. 자기들것이 더 안전하니까 "기능은 같아도 우리걸로 교체하세요"다. 나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내 통장에는 현재 잔액 70만원 쯤 있고, 내 컴퓨터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들은 나를 이렇게 청통같이 보호해 주려는 걸까. 정작 그 돈 70만원이 피싱으로 날아가면 어차피 책임은 나한테 물을 거면서...

그런데 가만히 보다가 반가운 말이 눈에 띈다.

"[통합설치프로그램]을 설치하려면 여기를 누르십시오."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위안이 된다. 6개를 따로따로 설치하는 것 보단 낫겠지. 불안불안하지만 그래도 차악이다. 눌러본다. 엉성하게 주춤하다가는 살짝 멈추는 듯 한다. 막던진 내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에러가 발생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 주십시오 에러코드 e-386#"

그리고 모니터 윗줄 상황판에는 안*수 연구자께서 하셨던 백신이 떡 하니 자리를 잡았다. 종료도 안된다. 분명히 에러였는데 아이콘이 생겨있다. 그리고 내가 뭘 누르건 친절하게 문제점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준다. 정말 고맙다. 그리고 원래의 업무, 공인인증서는 해결이 안되고 있다. 오늘밤도 글렀다. 벌써 4시간이 지나 새벽 2시를 지나고 있다. 어두운 곳에서 모니터를 너무 오래봤다. 졸린다. 어깨도 아프다. 나한테 도시락 폭탄이 두 개 주어지면 K은행과 S증권에 하나씩 상자에 넣어서 보내고 싶다. "이 상자를 열려면 공인인증서와 보안프로그램을 설치하세요"란 메시지와함께... 두 놈들의 기관에 이름을 등록하고 계좌를 열고 그렇게 시작한 내가 잘못이다. 다 내탓이다.

눈을 질끔 감았다. 후회가 밀려온다. "오늘 저녁 그 수제 맥주집을 가야했어…"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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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맥주집이 가고싶어지는 마무리네요. 저도 집 근처에 벼르고 있던 수제맥주집이 있는데 오늘은 꼭 가야겠습니다. 혼술 도전!! 에휴 한국은 정말 공인인증서 이거 너무 불편한 것 같아요..ㅠㅠ

수제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아쉽게도 전 아직 못마셔봤습니당 꼭 다녀오세용~ 후기 남겨주시고요^^

그놈의 공인인증서는 도데체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어요;;

실제로 열받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아웅 ~ 제가 지금 태국에서 은행계좌를 스마트폰으로 쓰는데요. 공인인증, 보안카드, 보안프로그램 이딴 거 없습니다. 하지만 접속한 번 할 때마다 이메일과 문자로 액티비티 생겼다고 날아옵니다. 누군가가 제 계좌에 접속하면 바로 알 수 있죠. 비밀번호 하나면 들어가집니다. 이체할 땐 다른 비밀번호 하나 더. 끝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정말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번 정부가 좀 없애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아, 그놈의 공인인증서! 공인인증서랑 보안 프로그램 설치하다보면 몸에서 사리 나올 듯해요. ㅎㅎ 글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

정말 화가 치밉니다. 그래도 걸핏하면 뚫리고, 책임은 피해자한테 증명하라 그럽니다. 아우.. 고맙습니다.^^

So interesting.

하, 수제 맥주집을 가야했습니다 ㅠㅠ
잔잔한 글에서 굉장히 공감되는 짜증이 인상적이에요.
공인인증서 한 번 쓰려면 온갖 것을 다 깔아야하고... 번거롭고 싫습니다 3:-(

@maritus님^^ 고맙습니다. 공인인증서가 아니라 공인분노서랄까요… 맞습니다.그 쓰레기 보안 프로그램들…. 우리컴퓨터를 걸레짝으로 만들죠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글을 정말 잘쓰시네요 ^^
작가 하셔도 될듯합니다 !
업보팅합니다 ^^

@okja님~ 부끄럽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Keep sharing such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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