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단편_ 응용인문학강의실 M201 #5"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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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큰 사이즈로 주문했다. 배가 부를만큼 많은 양이다. 머리가 멋지게 하얀 평소 의지하는 교수님 한 분이 빵을 사러 카페문을 열고 들어온다. 젊은 시간강사 제자라 안돼보였는지, 아니면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옆 의자를 당겨 슬쩍 앉으신다.

"곽선생 원래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시나"
"아네… 요샌 뭐 다들 이렇게 마십니다."
"한국사람들이 문제가 많아. 다들 밥은 부실하게 먹고 커피를 쯧쯧… 커피는 열매를 볶고 태워서 갈아서 먹는 것 아닌가. 이건 차가 아니거든. 음료에도 수준이란게 있어요. 자네같이 젊은 사람앞에서 이런말 뭣하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요새 젊은 사람들은 옛날사람보다 확실히 생각이 부족해. 젊은 사람들이 문제가 많은건 자네도 알지?"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도 그들의 어른들로부터 저런 취급을 받아서 배운 것을 답습하는 것일테니 표면상 수긍하는, 성의없는 대답을 들려줬다. 그들이 없는 4-50년 뒤의 세상을 젊은 이들이 말아먹어버릴까 걱정되서 어떻게 편히 눈을 감으실까 걱정안되는 바도 아니었다. 하긴 어쩌면 그들은 더 나은 젊은 세대들의 능력이 자신들을 산채로 박제해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굳이굳이 문제가 많다고 이유같지도 않은 것들을 뭉뜽거린 강조를 반복하는지도. 하지만 지금의 우리세대만큼은 새로 태어나는 미래의 재목들이 더 나은 아이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까지는 갖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낫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할 수 있는 포용력 정도는 가진 어른일 수 있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대개 이전의 전통을 배웁니다. 하지만 실은 그것들과 싸워야 하죠. 이전의 것들은 더 풍부한 경험을 갖고, 실패를 수정해 왔기 때문에 더 완전하죠. 아니 온전하다는 표현이 낫겠군요. 완벽이 아니라 부족한 요소들을 다양하게 채우면서 왔으니까요."

"하지만 블루투스 송신 사운드를 바로 축음기에서 수신할 수 없는 건 어느 한쪽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맞지 않아서죠. 시대마다 일반적으로 공유, 호환하기 쉬운 것들이 있어요. 생각의 역사에선 그걸 사조(思潮)라고 부르고, 조금 부정적인 표현으론 시류(時流)라고도 하죠. 영어에선 둘 다 trend에요. 대개 이전의 것들을 가진 사람들은 그 풍부하고 온전함을 새로운 세대들도 따라주길 바랍니다. 그걸 보수라고 합니다. 보수란 말은 어떤면에선 전통(tradition)과 같은 말입니다. 반대로 새로운 걸 시도하려는 이들은 그걸 거부하죠."

"이전 세대들이 무조건 삶의 덕목으로 여겼던 검소儉素, 근검勤儉, 절약節約이란 소박素朴한 삶, (소박疏薄은 아니에요 이건 여권이 약하던 시절 아내를 구박한다는 뜻이에요. 구박이랑 같은 의미냐고요? 의미는 비슷하지만 구박驅迫은 이렇게 씁니다. 하지만 박대薄待는 같은 글자를 쓰는군요. 언제 한자 이야기도 한 번 해보기로 하죠.)"

"검소, 근검, 절약, 소박 등은 주로 삶의 태도를 수식하는 말이죠. 아끼고, 덜 쓰고, 적은 양으로 살아간다는 뜻이에요. '근勤'은 부지런하고 열심히'란 의미에요. 실제 삶은 어떤가요? 여기에서 자원이 아니라 돈을 아끼는 것은 이미 경제순환구조에서 보면 무조건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이미 지난번에 말한 적이 있죠? 산업을 장려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그 결과물인 물건을 안 사는건 좀 바보같지 않아요? ㅎㅎㅎ"

"그리고 또하나 안쓰고 절약한다는 것이 지향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박한 삶, 간단한 삶이죠? 하지만 사람의 생존에는 많은 물건들을 필요로 해요. 그래서 그걸 아껴서 잘 보관해야 합니다. 냉장고에 많은 먹거리가 가득찬 건, 반드시 욕심이 많아서라기 보단 아끼고 보관하려다보니 그렇게 되는거에요. 1년에 한 번씩 필요한 물건도 우리는 새로 구하는데 드는 자원과 필요할 때 즉시 사용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기 위해 당장 쓰지 않는 물건도 보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물건들을 의도치 않게 돌보며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의 관리에 삶의 시간을 기꺼이 소비하죠. 그러니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절약하면 절약할 수록 소박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겁니다. 본래의 목적, '간단한 삶'은 사라지고 '절약'이란 형식만 남은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실 '검소한 삶'이란 말은 현대에 와서 '절약하는 삶'이란 단어로 번역하면 안됩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낫죠. 이미 1960대엔 미니멀리즘은 대두되었다고 봅니다. 미니멀리즘은 일본식 불교 수행, '禪zen'에서 시작됐어요. 처음엔 유행에 지나지 않았는데, 80년대에 이미 이 방식은 불교+명상+디자인+산업… 이런 조합으로 폭발적인 시너지를 만들어서 미국이나 유럽사회처럼 좀처럼 유행을 타지 않는 동네를 휩쓸었어요. 오늘날 애플의 전자제품이나 무인양품의 물건들 보면 기능에 필요한 아날로그 조작부가 없잖아요. 그게 이젠 일반적이지만 20년전만 해도 버튼이 많을 수록 비싼 제품이었거든요. 수없이 많은 기능들을 없애버리고 전원버튼 하나만 달랑 달려있으니 기존의 다양한 기능을 중시했던 매니아들 일부는 긍정적으로, 일부는 부정적으로 광분했죠. 원래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던 '기능재'와 '감성재'는 이젠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이젠 감성재가 기능재를 앞서고 있다고 해야겠군요."

"미니멀리즘은 그야말로 갖고 있는 짐을 다 갖다버리고 생존에 꼭 필요한 물건만 남기는 겁니다. 당장 쓰지 않는 물건들을 주기적으로 버려가는게 유일한 노력이죠. 요샌 미니멀리즘으로 살기 좋은 시절이에요. 가까운 곳에 필요한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요. 미니멀리즘으로 살면 물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물건들이 적을수록 좀 더 많은 시간을 정보습득과 사유에 보낼 수 있죠. 물건을 분류, 정리, 관리하는데는 그만큼 많은 시간이 들거든요."

"이런 방식의 변화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패턴도 바꿔놓습니다. 한동안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광고까지 해가며 비판했죠? '가족간의 대화가 단절되었다'고요. 글쎄요.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가정에 대화가 많았었던가요? 우린 이제 다른 방식으로 대화합니다. 통신을 통해서 말이죠. 스마트폰 이전의 대화가 단절된 것과, 스마트폰 이후의 대화단절은 같은 이유입니다. 관심주제의 부재죠. 사람은 누구나 관심사가 다릅니다. 관심사는 다만 한 사람의 취미가 아니라 각각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공유할 수 없으면 대화란 불가능하죠.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다른사람의 세계에 깊은 관심이 없습니다. 다같이 보고 있는 날씨를 서로 왜 물어보겠어요? 정말 그 사람의 안녕이 궁금해서 안녕하시냐고 물어보는 건 아니잖아요."

"아, 물론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사고가 날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걸어다니거나 운전할 땐 당연히 사용을 자제해야죠. ㅎㅎㅎ"

"그럼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들 중 어느쪽이 옳으냐고요? 그건 답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각각 나름 검증된(?) - 새로운 것이 검증되었다니 좀 이상하지만 - 방식이니까 개개인이 좋은 걸 선택하면 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서 새로운 시대가 밀려오니 옛날 방식보단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면 좀 유리해지는 건 맞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세상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것이죠? 좀 역설적이지만, 세상은 대개 '지키려는 사람'보단 '바꾸려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거든요."

아침에 노교수에게 한 말이 - 물론 나 혼자 마음속으로 되뇌인 생각이었지만 - 미안해졌다. 그도 인생을 당신의 시대에선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살아서 지금에 이르렀을텐데. 다들 생존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하지만 "그걸 좀 덜어내고 가벼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었다면…"하는데 생각이 이르자 미안한 마음이 싹 가셨다.

"이런 *댕…"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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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어이쿠 @nand님과 @krexchange님 두 분이 지뢰를 밟으셨군요… 두 분께서는 이 포스팅 SBD보상의 5%인 0.298 SBD씩을 받으셔야합니다. 맘대로 지뢰설치해서… 쏴리!

퀴즈 프로그램에 나올 것 같은 예시네요. 다음 중 한자가 다른 것은?

  1. 구박
  2. 소박
  3. 박대

그건 그렇고, 미니멀리즘이라... 마음을 비우는 미니멀리즘도 필요하겠군요. 오만 것 다 신경 쓰기엔 바쁜 인생이죠.

ㅋㅋㅋ 역시 @nand님 센스! 캬캬캬 재밌을 것 같습니다. 함 만들어봐야겠어용 ㅋㅋㅋ 넵. 미니멀리즘. 제가 요새 밀고 있는 방식인데… 타고난 욕심이 너무 많아서 물건을 잘 못버립니다. ㅜㅜ 하지만 일단 버리는데 성공하고 나면 확실히 후련해지긴 하더군요.

맞아요 저도 스맛트폰 때문에 가족의 대화가 단절된다는 말 들을때마다 얼탱시가 없어요. 꼭 그런말 하는 사람들이 티비는 죽어도 못버림.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단점, 범죄, 부정적인 요소들을 새로운 것들에서 먼저 떠올리는 걸까요. 거참...

마음 속으로 하신 말씀을 그 교수님께 했다면 뒷목 잡고 넘어가셨을거 같지만ㅋ 구구절절 맞는 말씀입니다.ㅋ 고대 벽화(?) 인가에도 ‘요즘애들’ 버릇없다 는 말이 있다잖아요. 예전에 어떤 분이 버스 안에서 무례하게 자리양보를 요구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요. 가끔은 그 기성 세대로서의 모든 이득은 볼려고 하면서, 젊은 세대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저역시도 눈살을 찌푸리기도 해요.

맞아용!!! 저도 그런 분들 본 적 있는 것 같습니다. 선배들에게 인정과 격려를 받지 못하는 건 슬픈 건 같습니다. 게다가 역차별이라니 말입니다. @bookkeeper님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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