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단편_ 응용인문학강의실 M201 #1"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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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 응용인문학강의실 M201 #1"


"저는 곽봉투에요. 이번 학기를 시작하기전에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시작하고 싶군요."

한 학기면 헤어질 터이니 강사의 이름에조차 관심이 없다. 잘해봐야 그냥 새로운 정보를 얻는 정도일터이다. 밑져야 본전이니 조금이라도 손해보면, 500만원짜리 수업료에서 3학점이니 학기당 18학점을 이수한다면 1/6,
따지고 보면 80만원이 넘는 수업인 셈이다. 물릴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재수강도 있고, 드롭해버려도 되지만, 오롯이 내 손해다. 그러니 새학기가 그리 기쁠일도 설레일 일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낯선 강의 이름은 또 뭔가 싶다. 응용인문학이라니, 인문학이 응용능력이 없으니 응용을 하라는 건지, 인문학 텍스트를 응용해석하라는 건지. 우리네 강의란 온전한 책의 학문과 사회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학문 사이에서 어느쪽에도 서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것만 같다.

안나오면 사람취급 못받는 대학이, 사회로 진출하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관문, 하지만 그 관문을 겨우 통과한 디플로마 한장은 기본 1-2,000만원짜리. 필수 빚쟁이로 시작해야 하는 이놈의 청춘들이라니.

청춘이니 아파도 된다고, 이건 뭐 자신도 아팠으니 너도 아파보라고, 맞좀 보라는 말과 뭐가 다른지. 적어도 나는 그랬다. 미루어 짐작컨데, 초롱초롱한 저 눈빛 뒤에 아마도, 강단에 서 있는 내게 희망따윈 없으니 '이번 강사가 제발 폭탄만은 아니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 학기를 나름 큰 점수 하락없이 해 봤으니 자신은 있었다. 지난 학기 강의평가 5등급 중 아슬아슬하게 5등급에 들어갔다. 3등급 이하로 두 번 연속 들어가면 한 학기동안은 기회가 있어서도 쉬어야 한다. 다행이 요구되는 지식보다, 전달하는 스킬에 좀 더 스탯을 찍어둔 덕인지, 크게 뛰어난 것은 없었는데 운좋게 넘어간 셈이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정말 내가 대단하다며 슬쩍 우쭐해 본 게 진심이다. 물론 내가 가진 표면적인 기술에 비해 들어있는 실제 내용물의 빈약함을 생각하면, 쪽팔리지만, 그 빈약함과 쪽팔림을 애써 감추며 모른체 한다. 그리고 바보도 알아챌 수 있는 어색태연한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톤을 평소보다 굵게, 그리고 말의 속도를 늦추는 따위의 가식을 부려본다.

"인터넷은 거의 실시간으로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합니다. 왠만한 전문지식에도 말이죠. 그래서 이번 수업에선 특별히 교재를 쓰지는 않을거에요."

"저... 그래도 한 과목을 정리하고 찾아보기도 해야하고... 교재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나요...?"

한 학생이 안경을 연신 고쳐쓰며,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다. 그의 책상위는 노트와 다양한 볼펜들이 흐트러짐없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 만큼이나 작은 전자시계와 수정펜, 15센티 자까지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전부 핸드아웃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한주에 2-4장 정도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봐야하는 책은 5-6권 정도 될겁니다. 먼저 시험에 너무 신경쓰지 마시고, 중간과 기말 중 시험은 한 번만, 한 번은 레포트로 하죠. 8명이군요. 강의당 9명 이하면 절대평가가 가능합니다. 다행이군요. 저는 상대평가를 아주 싫어합니다. 물론 점수를 매길 때 제 감정소비를 많이 해야한다는 점때문만은 아닙니다. 상대평가의 장점이라면 학생을 패스와 페일, 점수로 등급을 매기는 것. 변별력. 그걸 쉽고 객관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 그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말 나온 김에 상대평가 이야기로 이 수업을 시작해보죠. 상대평가는 매우 쉽고 간단합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상대평가란 폭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을 Human 혹은 H&A, Human and Art라고 부르는데요, '사람'과 '지식'이죠.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배우는 지식들입니다. 사람은 이성뿐 아니라 감성, 그리고 스스로가 알고 느끼는 이성과 감성에 대해 다시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능력, 이걸 반성(反省)이라고 해요. 맞습니다. 잘못했을 때 썼던 반성문의 반성.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본다는 의미로 쓰이죠. 원래는 도덕적인 개념보다도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마치 다른 사람 - 이걸 '타자(他者)'라고 합니다. - 이 보듯이 객관적으로 보는 '행위'를 의미하는 겁니다. 이 때 자신의 행동의 세세한 잘못을 검토하라고 대개 우리는 배웁니다. 요새 많이 쓰는 말이죠. '자아검열'입니다. 군부독재가 낳은 개념이죠. 그건 배움이라기 보단 실은 세뇌쪽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나와 상대에게 모두 있음을 알고, 다양한 상황과 조건에 따른 상대의 마음과 내 마음의 복잡한 단계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어떤 몇 가지 기준으로 등급을 매기는 건 대단히 이상한 일이에요. 리딩, 리스닝, 라이팅, 스피킹 네 가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그 사람의 영어수준을 평가하죠? 영어시험도 그런데 수업시간에 하나의 과목을 이해하는데 주어졌던 개념이나 정보를 암기하는 수준만을, 그것도 상대적 기준으로 내가 아는 것이 다른 누군가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걸 통해 내가 더 높게 평가된다는 것. 분명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닌것 같아요"

기계와 전자문명이 발달하는 것은 분명 부작용이 있어요. 하지만 고도문명의 발전이란 오히려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기계, 아 이젠 '로봇'단계군요... 로봇이 인공지능이 되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히려 문제가 되는건 그 반대에요. '인간의 로봇화'죠. 그 기본이 사람을 점수로 평가하는 겁니다. 점수판은 정해져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 점수에 따라서 더 높은 평가를 얻기위해 스스로 무한경쟁하죠. 경쟁은 사람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에요. 가시적인 결과가 막 나타나고, 일이 잘 진행될 수 있게 합니다. 빠르고, 순조롭게. 아주 효율적이고, 많은 걸 생산해 낼 수도 있어요. 이게 바로 로봇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미 인간이 아닌 로봇의 삶을 사는데 익숙해져 있단 말이죠."

그 바탕에 '자본주의'와 '산업'이란 양날의 검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뚜레뚫어에서 미리 부탁해둔 빵과 커피가 왔다. 파리날려 빵이 더 맛있었던 것 같은데, 두달만에 빵집이 교체된 걸 보면, 캠퍼스에서 장사가 안될리는 없고, 뭔가 이권과 관련된 매장과 학교사이에서 복잡한 일이 생겼겠구나 슬쩍 생각해본다. 가능하면 강의시간에 빵과 커피를 마시면서 나머지 한시간은 질문을 통해 하나의 개념을 갖고 관련된 정보들을 정리해주는 방식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머릿속에 정제된 정보를 밀어넣어주는 방식은 왠지 오리목을 붙들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영양가 높고 떡진 사료를 틀어먹이는 구역질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그 방식이 여전히 익숙한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 시간이 그들에게 조금은 자유롭고 노는 시간은 되어주었지만, 그래도 공부라 함은, 책과 펜을 들고 좀 더 많은 개념들을 사전적인 정의를 곁들여 이해하고 머릿속에 기억해 두는 것이었다. 생각과 대화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걸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강의실에 가득,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커피와 빵의 좋은 향기가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투비콘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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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팅주사위 당첨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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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렇게 큰 돈을!!! 고맙습니다 ㅜㅜ

감동적인 @soosoo님 안녕하세요! 입니다. 짱재밌는 @bree1042님이 너무너무 고마워 하셔서 저도 같이 감사드리려고 이렇게 왔어요!! 짱재밌는 하루 보내시라고 0.2 SBD를 보내드립니다 ^^

엇 이번엔 고양님이세용~ 고맙습니다~~~

이번글은 제게 쪼끔 어렵긴 했지만 열심히 잘 봤습니다. 수수님은 아예 중편 정도로 소설을 쓰셔도 좋을거 같아요. 글을 너무 잘쓰십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서 다음 내용이 대체 뭐가 나올지 궁금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거 같아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세계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겁도 없이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항상 해주시는 과분한 평가에 감사드린답니다.^^

뚜레뚫어 파리날려 ㅋㅋㅋㅋ
진지한 글속에서도 재치만점이신 수수님 :)))

@indygu2015님~ 역시 이번 포인트는 네이밍이군요^^ 고맙습니다~

you're making steemit a great community with your content soosoo! keep it up!

Thanks for coming~!

굉장히 집중하며 읽고 있었는데 뚜레뚫어와 파리날려에서 피식 웃음이.. ㅋㅋ

ㅋㄷㅋㄷ 고맙습니다. @okja님~~~

전 수수님의 글들이 너무 좋아요! :)
이렇게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자타공인 인기작가 @bree1042님께 칭찬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영광입니당 고맙습니다^^

대학교 이전의 교육이 대학교육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좀 더 열린 사고를 하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면, 점수를 얻는 즐거움보다 배우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느꼈을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공부를 너무 답답하게 생각한 것도, 그렇다고 열심히 한 게 아닌 것도...!ㅎㅎ

동의합니다. 이전과정이 너무 공부를 위한 공부로 몰아부치니까요… 바로 그 자유로움을 너무 억압했던게 아닐까 싶어요. 요샌 좀 달라졌나요…?

저도 요즘 대학생이 아니라....(아련)ㅠㅠ

...(이런) 헐... @sunnyshiny님께 하는 질문이 아니라 독백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시죠? ㅋㅋㅋ

  • 보팅한 사용자에 따른 주사위 순위(0.01이하 보팅자 제외)
순위아이디주사위보팅$비고
1seongbuk8900.021
2krexchange8580.274
3odongdang7900.040
4bree10427900.028
5segyepark7870.462
6mastertri7160.084
7floridasnail6810.152
8danbain6240.991160
9soosoo5360.084
10yangpankil274760.018
11okja4590.153
12sunnyshiny3860.014
총계2.365

💣쾅! 어이쿠 @seongbuk님과 @sunnyshiny님 두 분이 지뢰를 밟으셨군요… 두 분께서는 이 포스팅 SBD보상의 5%인 0.046 SBD씩을 받으셔야합니다. 맘대로 지뢰설치해서… 쏴리!

어이쿠야~ 뜻하지않게 이런행운이 ㅎㅎ 감사합니다 이런 지뢰라면 언제든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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