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단편_ 응용인문학강의실 M201 #3"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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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인문학이란 과목은 문과대 융합인문사회과의 3-4학년 전공과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제3세계 언어철학전공의 박사과정이었다. 대학의 ‘기업경영’이란 새로운 방식은 학교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쩌면 피해갈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많은 전공 혹은 과들이 사라지게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강의를 맡은 융합인문사회과는 3년 뒤면 학교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과가 되는 운명이었다.

그 덕에 함부로 - 내가 생각해도 ‘함부로’란 말의 함의를 잘 모르겠지만 - 대학원에 진학하면, 직장 못구하고 사회적응 힘들어서 대학원 진학했다는 오해 - 이게 오해인지도 잘 모르겠다 - 를 받기 쉽상인 분위기일 정도니 오죽하면 ‘박사 인플레’란 말이 있을 지경이었다.

그 말과 같이 해당전공의 학위를 받은 사람과, 훨씬 오래전에 이미 수료를 한 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그 과목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 전공이 증발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외래강사 - 대개는 시간강사라고 부르는 - 의 자격은 한 학기짜리 계약이긴 해도 CV에 써 올릴 때 위상이 달랐고 또 그 경험의 여부가 학계에 남을 사람들에게 주는 경력 한 줄은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빔과 노트북을 연결하는 잭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대중강의는 차라리 익숙했지만 전공수업, 더구나 내 전공과 상이한 3-4학년 전공수업은 신경이 더 곤두설 수 밖에 없었다. 밤새 너무 긴장상태로 자료조사를 끝내다 보니 고질적인 건망증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다행이 같은 모델을 쓰는 학생에게 휴대용 잭이 있었기에 식은땀을 닦으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지식이 지식일 수 있는 것은 링크에요. 연결되어있기 때문이죠.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었고, 우리의 산업화를 이끌어 냈으며, 우리는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누리면서 매우 발전된 현대의 사회에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 세련된 미국을 따라 배우고,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혹은 우방으로 살고 있죠. 그래서 미국이란 나라는 분명 고마운 나라에요. 이건 분명 사실이죠. 거짓말은 아닙니다.

이걸 우리는 ‘텍스트’ 즉 주어진 자료라고 불러요. 하지만 텍스트 자체가 사실이란 것이 정말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에요. 왜냐면 하나의 사건은 평면이 아니라 다면이거든요.

그래서 사실이 다른 측면에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나의 사건은 일정시간동안 딱 시작되어서 벌어지다가 딱 끝나죠. 상황종료. 헤프닝이요. 하지만 결코 그걸 시간으로 딱 자를 수가 없어요. 나비효과 알죠? 그 헤프닝은 다양한 원인 혹은 이유들이 만나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요. 물론 나비의 날개짓이 바로 태풍이 되는 건 아닙니다. 날개짓은 아주 작은 불씨일 수도, 혹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트리거일 수도 있어요. 혹은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죠.

앞 뒤의 시간을 조금만 더 연결해보면, 미소양국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정치적 기준으로 삼고 시작한 다툼에서 시작된 열강들의 충돌이 한국전쟁이죠? 일반시민들은 분명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체제에 대해 분명 관심이 많았을거에요. 하지만 틀림없이 ‘전범’ , 이렇게 불러야 해요. 전쟁은 소수의 욕심으로 충돌하는 권력들의 다툼으로 시작되거든요.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뒤로 빠지고 누가 싸웁니까? 각국의 국민들이 싸우잖아요. 장기의 말 같은 신세에요. 그래서 모든 전쟁의 주도세력들은 ‘전쟁범죄자’라고 불러야 해요.

이런 전범들은 틀림없이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었을거에요. 아니 없었어요. 그건 사실 그들에겐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전쟁자체는 열강들이 벌리고 총들고 싸운건 어떻게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끼리 한 거에요. 더구나 40년만에 되찾은 해방된 우리땅에서 말이죠.

미국이 거들어서 핵무기 두발로 일본을 항복시켰죠? 덕분에 우리는 40년간의 식민지에서 벗어났고요. 그래서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최고의 우방이 되었어요. 일본은 재기 불능이었어요. 모든 나라들로부터 공격받고, 여지껏 역사에 없는 핵폭탄을 두 대나 맞았죠. 더구나 자국의 군대를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상황만 어려운게 아니라 사실은 굉장히 치욕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이 지금 동북아 최강국으로 어떻게 자랄 수 있었어요? 바로 한국전쟁 덕분이죠.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와 맞붙을려면 태평양 건너와야 하는데, 베이스켐프를 어디다 지어야 하겠어요. 일본이죠. 한국전쟁 때 미국의 군수물자는 100%일본산이죠. 그래서 일본은 재기하고도 남을 수 있었죠.

비유가 너무 길어졌군요. 단면은 분명 팩트지만 그 팩트의 앞 뒤로 전혀 반대의 사실이 또 있어요. 전체의 팩트와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반대되는 다른 팩트는 그래서 실제로 존재할 수 있어요. 각도가 틀어지면 시각적으로 왜곡이 생기죠? 그 왜곡은 사실일 수도 착각일 수도 있는겁니다. 그래서 하나의 텍스트는 아무리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해도 온전할 수는 없어요. 텍스트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시간적으로 앞 뒤를 다 살펴봐야 해요. 그리고 그 텍스트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다면은 단면과 다르게 해석되죠? 그래서 그걸 맥락, 전체적인 흐름, 그리고 상황, 바로 ‘컨텍스트’라고 합니다.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는 훨씬 중요합니다. 대개 우리는 습관적으로 텍스트만 읽고 팩트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텍스트의 뒤에 있는 컨텍스트를 읽으려면 우리의 뇌는 굉장히 피곤해집니다. 굳이 그럴 필요성도 못느끼고요. 하지만 그래서 단순한 판단을 쉽게 내려버리는 것은 인문을 하는 이들에게는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닙니다. 요것도 이 이야기의 맥락과는 좀 다르지만, '판단중지', 에포케(epoché)가 필요하죠.

세상의 시점이 단면이 아니라 다면을 가진 입체라는 걸 이야기하려다가 너무 많이 왔다. 갑자기 한 학생이 질문한다.

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같은 것은 동물세계의 오래된 전통 아닌가요? 저는 전쟁도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자체도 나쁘지만, 결국 조선이 제대로 된 군대를 양성하지 않아서 외세에 당한 것처럼, 당한 대상에게도 사실 책임이 있잖아요. 준비를 안했다가 당해놓고 전쟁을 일으킨 자를 대상으로 전범으로 몰아부치는 것도 좀 안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도둑맞으면 도둑은 물론 나쁘지만, 도둑맞은 사람에게도 잘 간수하지 못한 책임이 있지 않나요?

안경 낀 학생은 오늘도 질문을 한다. 휙 혹은 툭 던지는데 점점 적극적이다. ‘질문’ 이걸 못하고, 못하게 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많은 단점을 만든 주범 아니던가. 그리고 이 학생의 질문은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저는 이 질문에 지금 당장 제 생각을 단답형으로 말씀드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 좀 더 시간을 갖고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밤새 고민했던 긴장이 풀리고 혀 속 깊은 곳이 깔깔하다. 무엇인가를 마치고 난 후의 이 몽롱한 피곤이 싫지만은 않다. '좋은 선생이란 어떻게 말해야 할까'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걷다가 발을 헛디뎠다. 때마침 가방지퍼가 열려 있었던 걸 알아챘다. 가방속에 쑤셔 넣어두었던 종이쪼가리들이며 책이며 펜이 교정 바닥에 온통 흩어진다. 지나가는 학생들은 마치 매일 봐 온 장면을 대하듯 무심코 휙 지나간다.

… 좀 주워주지 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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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어이쿠 @clutho님과 @leesol님 두 분이 지뢰를 밟으셨군요… 두 분께서는 이 포스팅 SBD보상의 5%인 0.401 SBD씩을 받으셔야합니다. 맘대로 지뢰설치해서… 쏴리!

학과의 융합은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기 수단으로 행해져야 하나, 사실 그 뒷 배경에는 늘 경비절감이라는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창조를 위한 학과의 결합이 아니라 등 짐을 덜어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자리하고 있다. 참 쓸쓸한 현실입니다.

@soosoo님 참 잘읽었습니다.재미도 있구요. 지난 글 모두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soosoo 님!

고맙습니다. @himapan님 미천한 생각에 재미를 표해주셨습니다^^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미천한 글이라니요. 제게는 금과옥조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great post soosoo! keep it up! and thanks again for follo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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