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침입이 없었음에도 임금이 파천(播遷)했던 1624년의 아픈 역사와 그 나비효과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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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 포함) 시대에는 여러 번의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하는 것)이 있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든 가깝게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좀 더 멀게는 인조가 강화도 및 남한산성으로, 아주 멀게는 선조가 무려 의주까지 몽진을 거듭한 끝에 더 갈 곳이 없어 명나라로의 파천까지 염두에 뒀었던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외국의 침략이 없었음에도 파천한 일이 있었으니, 1624년 인조 때의 일입니다. 인조는 워낙 1637년 남한산성에서의 "삼전도의 굴욕"사건이 유명한 관계로 이 사건은 많이 묻혔습니다.

일단 이 전무후무한 사건의 전말과 그로인한 나비효과를 살펴보고, 다음 글에서는 당시의 반목과 배신의 끝없는 업보로 이 사건의 연장선 상에서 일어난 일들 알아보겠습니다.

당연히 이 아픈 역사의 교훈은 반목과 배신을 낳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것일 겁니다.


"이괄의 난"의 전말


① 인조반정 성공, 그 선봉에 섰음에도 논공행상 2급으로 밀린 "이괄"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주도세력인 서인들은 공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이가 있었으니 그는 "이괄"입니다.

원래 반정 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직위에 있었던 "이괄"은 반정 성공에 따른 논공행상 후에도 평안도 병마절도사 자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죽기살기로 이뤄 낸 반정, 그것도 그 선봉에 선 무관인 "이괄"에게는 그것이 푸대접이라 느껴질만 했을 겁니다. 왕을 조금 가까이에서 지키는 수준일 뿐 같은 레벨의 직을 얻었으니까요.

물론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원래의 직위를 잃었을 수도 있었을테니 벼슬을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은 서로 달랐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봉에 선 이괄에게 병조판서(=국방부장관급) 고위직을 주지 않은 것에는 당시 문관 대신들의 의견이 컸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병판 자리를 줘야 한다 하였지만, "이괄"은 호탕하나 큰 그릇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문관 대신들이 이를 제지했습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시절에도 북방을 지키는 중요한 자리였는데, 무관으로서는 출중하나 그 언행과 행실이 방탕하다는 의견들이 적지 않았었습니다.

이렇게 "이괄"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의문과 평소 행실 등으로 주요 문관 대신들에게 찍혔던(?) 이괄은 결국 논공행상에서 밀렸습니다.


② 그러나 "이괄"에게 북방군의 실세라는 나름 큰 권한 수여

인조는 선조 때의 고생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어려운 형편에 북방군을 창설합니다.

이미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의 피해가 다 수습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수십 년 간 붕당 정치가 이뤄지면서 나라 형편은 쇠약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금이 이미 1621년에 만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명나라를 위협하면서 날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기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지요.

북방군은 하삼도(충청/경상/전라)의 군사를 끌어 올려 정예군으로 육성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중요한 군대였습니다..

이 북방군의 부원수를 "이괄"로, 도원수는 "장만"을 임명했습니다만, 이괄은 좀 더 북쪽을 경계하며 1만 3천 명사를 내주었고, 도원수 장만은 오히려 직책이 높았지만 한양도성에 가까운 쪽에서 5천 병사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후금이 정예기병으로 급속도로 침략해올 것을 대비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죠. 이괄은 부원수였지만 무예가 출중하고 북방에서 근무해 온 실전무장이기에 더 북쪽의 방비를 맡긴 것이었습니다.

평소 그의 행실의 문제는 좀 있었고 주요 문관 대신들에게도 소위 좀 대드는(?) 그라 찍혔었지만, 반정공신이자 출중한 무장을 썪힐 수는 없으니 변방에서 군을 양성하고 대군을 주어 후금을 경계하도록 한 것입니다.


③ 1624년 역모 고변이 올라오다

그러나 이듬해 초 일부 조정 신하들이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고변을 하게 됩니다.

이괄은 북방군을 맡아 조선의 기존 전술인 산성 수호 전략 대신 평지에서 싸우는 기병 양성에 힘썼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문제시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2급 공신으로 밀리면서 불만이 있었을 겁니다. 그가 과연 어느 정도나 역심을 품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인조 역시 "그는 반정에 공헌한 충신인데 설마 그가 그러하겠는가?"라고 반문했지만, 조정 신하들은 그래도 불안하니 적어도 이괄의 아들을 한양으로 압송하여 심문하고 인질로 삼을 것을 간언하고 인조는 이를 재가해버리는데요.

같은 공신이었던 조정과 이괄의 이때의 반목은 서로 간에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합니다.

이괄은 이때 생각했습니다. "내 아들이 한양에 끌려가면 필시 목이 잘릴 것인데, 내 목이라고 온전하겠는가"


④ 1624년 이괄의 난 발발

자식을 잡으러 온 관리들을 베어버리고, 주변 지역 부하 장수들까지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맙니다. 평소 북방군을 꾸준히 통제해 온 터에 파견된 관리까지 베버린 터라 한양 조정에 이 사실이 전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기병과 조총부대 위주의 정예북방군 1만 3천을 이끌고, 이괄은 신출귀몰 지름길과 샛길 등을 이용하면서 작은 성들은 무시하고 바로 한양으로 진격을 시도하는데요.

평소 그와 친했던 무장인 "정충신"은 이괄이 난을 일으킨 것을 듣고 도원수 "장만"의 명을 받아 이괄을 계속 쫓게 됩니다. 정충신 또한 역모가담자로 몰렸었지만, 그는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름 그대로 충신이었고 비록 벗이었지만 이괄을 진압하기 위해 계속 쫒았습니다. 이때의 공로와 추후 후금과의 전쟁에서도 공헌한 이유로 "정충신"은 훗날 충무공 시호를 받게 됩니다.

충무공은 사실 9명. 이순신만 충무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괄은 양수겸장의 무관이라 기동속도가 빨랐습니다.

한양을 지키라고 평안도에서 실권을 줬던 북방군 실질 수장이 그들을 통제하여 신출귀몰 내려오자, 이를 막을 부대는 없었습니다.

도원수 장만의 5천 부대와 주변 성들에서 온 연합부대가 한양 코 앞에서 한번 맞서 싸웠으나, 이괄의 1만 3천병사에게 대패합니다.


⑤ 인조의 파천 및 이괄의 일일천하(흥안군의 일시적 즉위)

적을 막으라고 내주었던 정예군사가 인조의 목을 조여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피치못하게 한양도성을 버리고 일단 파천을 결정하고 수원으로 피신합니다.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목으로 인해 부하장수 하나를 돌보지 못하고 결국 이괄은 배신하여 인조와 조정대신들을 도성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한양을 점령한 이괄은 심지어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임명하고 새로운 조정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⑥ 혀를 찌른 관군의 도성 공격

이괄의 군대는 정예병이지만 원래 1만 3천이었고 도성까지 오면서 다소 그 수가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이에 파천한 조정은 주변 관군을 동원한 빠른 도성 습격을 목표로 했습니다.

행여나 도성 내 백성들이 이괄에게 투항한다거나, 이괄이 세운 조정이 자리를 잡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있던 것이죠. 자국 관군이 자국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그 와중에 본의 아니게 자국 백성들까지 죽여야 할 수도 있는 아픈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하삼도의 근왕병들이 미처 올라오기도 전에, 정충신과 장만 등은 한양의 안산(=현재 연세대 뒤편~무악재 쪽) 쪽으로 습격하기로 하고, 이괄의 보초병들을 먼저 없애서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안산으로 집결 후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안산은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도성과 가까워 성안이 다 내다보이는 좋은 입지였습니다. 안산을 뺏기면 이괄의 군대는 모든 것을 노출할 수 있기에, 이괄은 도성 밖으로 나가 안산에서 싸울 것을 명합니다. 이때의 이괄은 도성을 점령한 상황이라 사기충천하여 다소 오만한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굳이 도성을 나와서 싸울 이유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관군이 미처 모이지 못해 얼마 안될 걸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안산 위로 올라가면서 공격을 시도하다보니 이괄의 부대는 비록 정예병일지라도 피해가 극심해졌습니다. 관군 역시 조총부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대등하게 하루를 싸우고 이괄군은 결국 패퇴하는데요.


⑦ 자국 군끼리의 싸움을 구경하던 백성들, 관군을 택하다

무악재 고개에서 벌어지는 자국 군대끼리의 안타까운 당시 전투는 많은 도성 백성들이 관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응원하는 쪽에 따라 심지어는 꽹과리까지 두드리면서 봤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요.

패퇴하는 이괄군을 보자, 도성 백성들은 관군이 이긴 것으로 보고 그들에 합류합니다.

그렇게 관군과 도성 백성 일부가 이괄군의 후퇴로를 차단하자, 남대문 등 도주로가 막히면서 이괄군은 광화문 광희문을 통해 간신히 빠져나와 도성을 버리고 경기도 광주 지역으로 패퇴하던 중 정충신 등을 만나 또 싸우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그 군세가 급격히 약화되고 맙니다.

질병과 스트레스 치유를 기원하던, 서울의 숨겨진 문, 광희문(光熙門)


⑧ 인조의 공주 피신과 도성 재입성

수원에 피신해 있던 인조는 비록 관군이 승전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괄군이 경기도 광주 지역으로 퇴각한다는 점 때문에 수원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 충남 공주로 다시 피신했습니다.

원래 최악의 경우에는 전주까지 피신 계획이 있었습니다만, 이괄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공주에서 다시 한양으로 재입성하고 사태를 수습하게 됩니다.


"이괄의 난"이 남긴 주요 나비효과


이 사건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

제 생각에 내부분열은 큰 문제를 초래하므로 기본적으로는 반목과 배신이 발생하지 않게 유의하자는 것일 겁니다. 또한 이 싸움에서는 정치인 뿐 아니라 불필요하게 죄없는 병사, 백성 등 자국민들 간에 많은 살생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히 아픈 부분입니다..

청을 막으라고 밀어주었던 이괄의 북방군, 그러나 조정과 이괄의 반목으로 이괄이 배신하면서, 인조는 외국의 침략이 없었음에도 도성을 잠시 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반란군이라해도 그들은 엄연히 당시 인조의 백성이고 향후 청을 막아야 하는 관군들이기도 했으니 무분별한 전면전투는 가능한 최소화해야 했을 겁니다.

많은 인명손실(특히 정예군)이 난 이괄의 난과 그때의 전투들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의 정예군 손실로 인한 군력 약화는 불과 3년 후인 1627년 정묘호란 때 청이 손쉽게 한양까지 밀고 내려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또한 인조는 큰 반란으로 인해 왕으로 잘해볼 의욕이 꺾이고, 주변의 많은 이들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북방 배치 병력은 줄이고, 되도록 병력을 분할하여 배치함으로써, 청이 북방지역은 거의 빈집털듯 들어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되는 아픈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괄의 난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던 당시의 끝없는 반목과 배신의 업보들 올려드릴께요.

편한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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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역사이야기를 해주시던 선생님 생각이 나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괄이라는 이름은 들었는데 이런 디테일한 이야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까먹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고맙습니다.

네 저도 이름은 들었었고 드라마에서도 일부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저것 공부해서 정리해서 최대한 사실 위주로 올렸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 모든 것이 가만히 보면 인조의 정치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지도자의 중요성을 한 번 더 느낍니다.

네 당시 속사정을 다 알수는 없지만, 수백년 전쟁이 없던 조선에서 왜란 이후 아무래도 국력도 많이 쇠해있던 데다가, 명도 무너지면서 모든 것들이 퍼펙트스톰처럼 몰려왔던, 참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이 더 잘했으리라는 보장은 별로 없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부정적인 모습 위주로 많이 남은 것 같네요.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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